좋은 말씀/-묵상

감히 아무것도 더 물을 수 없더라.(눅 20:19-40) / 신동식 목사

새벽지기1 2025. 4. 9. 04:53

예수님의 말씀에 찔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분노를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책 잡기 위하여 스파이를 보냅니다.

의인의 모습을 하면서 예수님께 접근하여 흠이 될 것을 찾아서 총독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습니다. 사단이 가장 잘 쓰는 술수입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세금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이오의 형상이 담긴 돈으로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질문을 던져서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세금을 낸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비판 받을 것이고, 내지 않는다고 하면 국가에 불복종하여 총독에게 넘겨 줄 빌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가이사의 돈으로 통용하고 있는 자들은 세금을 내면 됩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함의가 담겨져 있음이 중요합니다.

그 이후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질문을 합니다. 일곱 형제의 한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첫째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 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여성을 위한 고대시대의 중요한 배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형제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곤란한 질문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확한 답을 주십니다. 그것은 부활 후의 삶이 이 땅의 모습과 다름을 알려줍니다. 부활후에는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결혼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가 될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천국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완성되어 더 이상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는 일이 필요없습니다.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는 그 영광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존재 목적이 다 달성되었기에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이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렵지만 이해의 수준에서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구나 죽은 자가 살아난 부활에 대하여 모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고백한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에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의 표현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러자 서기관 중 한 사람이 바르게 말씀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더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은 정직하지 않은 질문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질문에는 정직한 답을 얻고 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부정직한 질문에는 답을 얻어도 침묵만 있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정직한 질문이 충만할 때 삶의 충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질문이 삶에 풍성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도 이 질문을 향하여 달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