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분에 관한 중상모략도 점점 심해진다. 그 중 하나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제 정신으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제 정신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이 나사렛에 살던 가족에게까지 알려 졌고, 그분의 일행이 가버나움에 머물 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그분을 찾아나선다(20-21절). “붙잡으려고”에 사용된 동사 ‘크라테오’는 “체포하다”는 뜻이다.
그 즈음, 예루살렘의 유대교 권력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율법학자들을 파견한다. 유대교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바알세불”(22절)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사탄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들을 내어쫓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귀신”은 사탄의 수하에 있는 “악한 영”을 가리킨다.
이 사실을 꿰뚫어 보시고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고 물으시면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한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면 자멸하고(24절) 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면 제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25절), 사탄의 진영에 내전이 일어난다면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26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한 것이라고 답하신다(27절). “힘센 사람”은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가리킨다. “세간을 털어간다”는 말은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죄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28절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죄는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가 만날 때 용서 받을 수 있다. 진실로 회개할 때, 하나님에게는 용서 못할 큰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29절)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앞의 사건과 연결시켜 보면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사탄의 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킨다(30절). 새번역은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라고 번역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라고 번역해야 옳다. 예수님은 “영원히”와 “영원한”이라는 단어를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그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신다.
묵상:
진리는 때로 상식을 넘어섭니다. 영성은 때로 일상을 초월합니다. 땅의 나라의 질서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진리를 따라 영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때로 이 세상에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습니다. 너무 깊이 신앙에 몰두되어 광신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참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도 가끔 혹은 자주 비정상으로, 사차원으로 혹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세상사와 인간사가 비정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관습의 기준에서 예수님은 자주 비정상으로, 사차원으로 혹은 미친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분이 보고 믿는 것을 이 세상은 보지 못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미쳤다는 모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고후 5:13)라고 썼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재판정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는 “바울아, 네가 비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행 26:24)라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29절)라고 답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은 그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고후 5:7) 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철저히 상식적이고 철저히 정상적이라면 잠잠히 자신을 돌아 볼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알고 믿는 사람다운 면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저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과학적이며 너무나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 받는 것이 저의 매일의 목표였음을 깨닫습니다. 오, 주님, 저를 이 인정욕구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의 인정이 저의 목표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따라 상식과 합리의 경계선을 뛰어 넘어 진리와 신비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용기를 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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