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마가는 예수께서 바닷가(실은 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장면을 간단히 소개한(13절) 다음,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를 전한다. “길을 가시다가……보시고”(14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그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앞의 네 제자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다.
레위는 “마태”라고도 불렸는데(마 9:9), 직업으로는 세리였다. 로마 황실은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에게 거액의 세금을 걷어 보내라고 명령했고, 헤롯은 자기가 착복할 몫을 더하여 징수하도록 세리들에게 명령했다. 세리들도 자신들이 착복할 몫을 더하여 개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갈릴리 주민들 대다수는 과도한 세금에 짓눌려 살았다. 이런 까닭에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방 제국에 빌붙어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중 하나를 찾아내어 제자로 부르신다. 동족들에게 무시와 배척을 당하던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즉시로 따라 나선다.
레위는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잔치를 베푼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15절)이 모여 들었다. “죄인들”은 “범죄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활 형편 상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층민들”이라고 의역하는 것이 좋다.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는 동류다”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겸상할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16절)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고 답하신다. 예수께서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신 까닭은 그들의 죄에 눈 감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 거룩하게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
묵상:
제자를 고르시는 예수님의 기준은 특별합니다. 당시 갈릴리에도 스펙 좋은 사람들이 많았을 터인데, 예수님은 먼저 어부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부들은 체질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를 찾아가 부르신 것은 아주 이상합니다. 그런 사람을 제자로 데리고 다닌다면 애국심과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거나 외면 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유대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세상적인 스펙도, 신앙적인 열심도, 정치적 이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그 사람의 내면만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 율법학자들에게는 더욱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상대할 사람과 상대하지 말 사람을 아주 철저하게 구분하고 살았습니다. 상대 못할 사람들(죄인들)과 가까이 하면 자신들이 부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에 괘념치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을 부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율법학자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17절)는 말씀으로 당신의 입장을 천명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를 병에 비유하십니다. 병든 사람은 혐오하고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치료하고 회복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 창녀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하층민들을 가까이 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반면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 없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10)고 했는데, 예수님도 같은 생각이셨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딴지를 건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너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나는 너희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시는 셈입니다. 그들이 세리와 창녀와 하층민들을 혐오하고 배척한 이유는 그들의 자기의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더 없이 높으신데 낮은 데로 오신 주님, 찬란한 빛 가운데 계시지만 깊은 어둠 속에 오신 주님, 더 없이 거룩하신데 더럽고 추한 곳에 오신 주님, 낮아진 저희 마음에, 어두운 저희 영혼에, 더럽고 추한 저의 인생에 찾아 오시니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높으심과 광채와 거룩하심으로 저희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저희도 주님처럼 낮고 어둡고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 주님의 높으심과 광채와 거룩하심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의 본뜻 (막 2:23-28) / 김영봉 목사 (0) | 2025.01.15 |
---|---|
새 것이 왔다.(막 2:18-22) / 김영봉 목사 (0) | 2025.01.15 |
“인자”라고 부르신 이유 (막 2:1-12) / 김영봉 목사 (0) | 2025.01.14 |
감출 수 없는 그분의 정체 (막 1:40-45) / 김영봉 목사 (0) | 2025.01.14 |
예수님의 일상 기도 (막 1:29-39) / 김영봉 목사 (0) | 202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