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얼마 후,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다. 배가 고팠던 제자들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손으로 훑었다(23절). 율법은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는 것을 금지하지만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허용했다(신 23:25).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데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유형의 탈곡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그들을 따라 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예수께 여쭌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4절)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대답하신다(25-26절).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할 때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성막 제단에 올려 놓았던 빵)을 내어 주어 먹게 했다(삼상 21:1-10). 율법의 본뜻은 사람을 살리자는 데 있다. 따라서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는 율법의 자구가 아니라 본뜻을 따른 아비아달의 행위가 옳았으며, 제자들의 행위도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고 답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두 가지의 혁명적인 선언을 하신다. 첫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27절). 이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율법은 인간을 거룩하고 복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여러가지 부수적인 규정들(장로들의 유전)을 더하여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뜻을 지키기 위해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들을 거침 없이 위반하셨다.
둘째,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8절)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인자는 율법의 주인이다”라는 뜻이다. 10절에서 본 것처럼, '인자'는 자기 자신을 에둘러 가리키는 관용어이기도 했고, 다니엘서 7장 13-14절의 종말 예언과도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킬 때 이 칭호를 주로 사용하심으로써 "귀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암시하셨다.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절대 주권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구속되지 않으신다. 그분은 율법을 주신 분이며,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묵상: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문 율법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613개의 계명을 가리키고, 구전 율법은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을 실천하도록 율법학자들이 정해 놓은 지침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에 일 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려면 “안식일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해결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런 질문들에 답을 줄 수 있도록 지침을 정하여 전수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좋은 뜻으로 세부적인 지침을 만들어 놓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을 구속하고 옭아매는 굴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사람들을 감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그것을 거침없이 무시하고 위반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고 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서도 때로 혁명적인 말씀과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48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수정하거나 파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의 자구에 얽매어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기 위해,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예언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12:29-31).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에서 나왔고 사랑으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 자라갈 것입니다.
기도
바울 사도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이시여, 저희가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문자에 얽매어 스스로를 옭아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자라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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