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얼마 후,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어느 집에 머물고 계셨다(1절). 그분이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그 집에 몰려 들어 발 디딜 자리가 없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다(2절).
그 때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 하나를 들것에 실어 데리고 온다(3절).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한 그들은 지붕을 뜯고 그 사람을 달아 내린다(4절). 당시 가옥의 구조와 재질이 그렇게 하기에 용이했다. 병든 친구를 살려 보겠다는 네 친구의 간절함이 그런 행동을 하게 했다. 갑자기 위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일어나고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분노하여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그 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병이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아 보셨던 것이다.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질병의 증상이 아니라 질병의 뿌리인 죄책감을 치료해야 한다.
그곳에 율법학자 몇이 있었는데,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다(6절). 하나님 외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7절).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신(8절)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신다(9절).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말대로 되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반면,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안전하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면서(10절) 그 환자에게 더 어려운 말 즉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11절)고 명령하신다. 그러자 그 환자가 일어나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 나간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 용서의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증명하시고 사람들은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12절)고 감탄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인자”(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부르신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은 자신을 에둘러 가리키는 관용어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일인칭(“내가 배고프다”)이 아니라 삼인칭(“한 사람이 배고프다”)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동시에 “인자”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에 관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에게서 모든 권세를 부여받고 오셔서 다스릴 영원한 왕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신 것은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숨기면서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알아듣게 하시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묵상:
마가는 앞에서 여러가지 이적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마을을 다니시면서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동을 지켜 보는 사람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혹은 “이분은 누구신가?” 라는 의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도, 제사장도, 예언자도 그분에게 정확히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 이상이라면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로마인들은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된다고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전 5:2)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넘어설 수 없는 거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중풍병 환자를 고치시면서 이 궁금증을 한계선까지 밀어부치십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죄에 대해 용서할 권한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죄 자체를 인간이 지울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죄 지은 사람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의 용서를 대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주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용서를 전달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중풍병자의 죄를 직접 용서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행동으로써 예수님은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은밀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에게서 모든 권세를 받아 영원히 다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7:13-14). 예수님은 이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에게 이미 그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예언자도, 제사장도, 율법교사도 아닙니다. 그분은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그분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여기고 등을 돌리든지 아니면 그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율법교사들은 전자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참다 못해 결국 그분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제거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이 결국 그분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켰습니다.
기도: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저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십시오. 주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게 하시고, 주님의 위엄에 맞게 섬기게 해주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주님, 저희의 존재를 주님 손에 맡깁니다. 받으셔서 주님 뜻대로 사용해 주십시오. 오,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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