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인 창조는 아날로기아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한 표상될 수도 없다. 신적인 창조의 행위는 한번도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통일된 것이고 독특한 것이다. 이리하여 언제나 지속을 요구하는 시간도 창조의 행위로부터 배제된다. 창조는 흡사 갑자기,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렇다면 창조의 행위는 시간 밖에 있으며 무시간적인 것인가? 만일 그것이 무시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같이 영원한 것인가?
‘태초에’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표현은 태초가 그 속에 정립되어 있는 절대성 속에서 시간 속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대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을 시간의 태초라고 의미한다. 피조물의 시간은 빛과 낮과 밤의 주기의 생성과 함께 시작한다. 창조자가 만드는 모든 창조의 사역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나누셨다.”는 말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창조 자체만이 그것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 한번에 일어났으며 모든 면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태초는 아무 전제 없이 정립되어 있다.(97쪽)
위 첫 문장을 잘 보시오. “신적인 창조는 아날로기아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한 표상될 수도 없다.” 아날로기아(analogia)는 ‘유비’라는 뜻이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그 어디에서도 유비를 찾을 수 없소. 그래서 표상(Vorstellung)이 불가능하오. 저 말이 실감이 나오? 지금 우리 눈에는 이 세계가 자연스럽소. 낯이 익소. 당연한 것이기도 하오. 창조의 의미로 들어가려면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오. 어떤 원인에 의한 당연한 결과가 아니란 말이오. 진화론으로 세계를 다 해명할 수 없다오. 그것은 생명 현상의 어떤 흐름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것뿐이지 창조 사건 자체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오. 왜 진화를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오.
자연만이 아니라 역사도 비슷하오. 왜 로마가 멸망했는지를 완벽하게 해명할 수 있는 역사가는 없소. 아주 사소한, 그래서 전혀 이유가 될 수 없는 어떤 에피소드가 그 원인일 수도 있소. 모든 역사의 흐름이 우연한 것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뜻이오. 이 세상의 창조는 아무도 예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오. 하나님의 행위는 늘 그렇소. 한걸음 더 나가서 종말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도 표상할 수 없소. 거기에 해당되는 아날로기아를 우리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소.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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