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성령이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주장했다거나 지금 성령의 임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성령의 현실성을 좁히려는 현대의 경건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항거해야 한다. 성령이 마치 보통의 인간적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초자연적 지식과 경건의 모호한 원리인 것처럼 말해지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인간 인식의 허약성을 보충하는 어떤 종류의 구멍마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견해를 거부한다. 성령은 이성을 포기하기 위해서 숨어야 할 어떤 엄폐물이 아니고, 또한 종교적 주관성의 비합리성에 대한 위장도 아니다. 성령의 활동은 종교적 경험의 내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판넨베르크, 하나님 나라와 교회, 121 쪽)
교회가 ‘성령 공동체’라는 말을 그대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요. 이렇게 숙제를 낼 테니, 마음이 동하면 일주일 안으로 한번 풀어보시구려. “교회는 성령 공동체다.”라는 명제를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A4 용지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써 보시오. 10장이 많으면 5장으로 줄여드리겠소. 그것도 많으면 2장이오. 그 이하는 안 되오.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소. 그래서 성령 공동체 같은 신학 용어가 나오면 금새 머리를 아파하오. 이런 현상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라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대도 기분이 언짢을 거요.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가 되려면 반드시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야 하느냐고 말이오. 일반 신자들은 살아가기에도 바쁜 데 어떻게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느냐고 말이오. 그런 거는 목사들이나 열심히 공부해서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오. 할 말이 더 있으시오? 옳소. 신학 공부가 없어도 신앙생활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이다. 그런 공부가 평신도들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소. 모든 사람이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어야만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 듯이 말이오. 그런 전문적인 식견은 해당되는 사람이나 잘 하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요.
그런데 말이오. 이런 게 있소이다. 우리가 모두 의사들처럼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갖출 수는 없지만, 인간 몸과 그 치유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알고 있는 것이 좋소이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을 하면 의학적인 메커니즘을 알 수 있소. 그걸 알고 있으면 의사의 도움을 받을 때 모르는 사람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날 거요. 물리학도 그렇고, 문학과 예술도 그렇소.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거는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오. 그게 인문학적 훈련이 아닐까 하오. 신학도 그런 관점에서 신자들에게 필수적인 공부라오. 최소한의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신앙의 왜곡을 피할 수 없소이다.
위에서 판넨베르크는 성령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말하고 있소. 두 가지요. 하나는 성령의 현실성을 세계 전체에서 말하지 않고 단지 종교적인 경건성에만 한정하는 것이오. 다른 하나는 성령을 이성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오.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성령 이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대도 눈치 챘을 거요. 이는 마치 아버지를 단순히 용돈을 주는 분으로만 알고 매달리는 철없는 자식과 비슷한 거요.(2010년 4월16일, 금요일,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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