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하나님 나라(2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22. 04:55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그의 숨결은 전 창조를 통하여 호흡한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성령은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된다. 이 생명의 근원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미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관계된다. 이 미래의 빛에서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영이라고 말해야 된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신비가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생명 현상 전체와 하나님 영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에 관한 신약성서의 진술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교 사이의 긴밀성도 이해할 수 있다.'(122 쪽)    

    그대는 성령을 받으셨소? 이런 질문이 정확한 것은 아니오. 성령은 우리가 받아서 소유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휩싸일 뿐이오. 성령을 경험했냐고 물어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소. 성령을 ‘소리’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시오. 오래 전 소설을 영화로 만든 <서편제>를 보고 소리꾼의 세계를 새삼 감동적으로 느낀 적이 있었소. 그들은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걸 득음이라고 한다오. 소리를 얻는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해서 소리를 소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소. 소리에 휩싸일 뿐이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초월해서 소리와 일치되는 경험을 하는 것 같소. 나는 소리꾼이 아니니 뭐라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오. 다만 성령 경험도 소리를 얻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였소. 양쪽 모두의 경험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이 매우 명백하다는 말이오.

    성령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는 거요. 물론 인식이 없어도 성령을 경험할 수는 있소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바로 성령을 경험하는 거요. 숨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의 활동이라오. 성령이 없이는 그 어떤 생명도 불가능하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선험적으로, 즉 배우지 않고도, 모르면서도 경험하고 있는 셈이오. 그러나 경험에만 머물면 곤란하오. 성령은 훨씬 포괄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그래서 우리가 계량할 수도 없고 재단할 수도 없는 생명의 영이기 때문이라오. 예컨대 현대학문에서 유전공학이 각광을 받고 있소. 유전의 메커니즘도 성령과 깊은 연관이 있소. 물리학이 말하는 장 역학도 역시 성령과 연관이 있소이다. 그 모든 것이 생명 현상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라오.

    위에서 인용한 판넨베르크의 글에서 마지막 단락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판넨베르크는 거기서 성령에 대한 신약성서의 진술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했소. 양쪽이 모두 생명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오. 신약성서가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모두 생명 사건이라오. 부활은 궁극적인 생명이오.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을 전제하고 있고, 성령을 전하는 사람은 부활을 전제하는 것이오. 성령은 곧 부활의 영이라고 말해야 하오. ‘영’이라는 단어도 설명이 필요하긴 한데, 오늘은 거기까지 나가지 않았으면 하오. 그대에게 성령과 부활 경험이 나날이 깊어지기를 바라오. (2010년 4월17일, 토요일, 생명의 바람이 온 대지를 덮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