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 후손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으신 까닭은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을 노아에게 되풀이해 주심으로써 아담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끔찍한 홍수 심판이 세상에 임했지만, 인간 안에 있는 죄악은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이 생존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 심판의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은 것뿐입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도 여전히 죄가 살아있었습니다. 심판으로도 죄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형벌이 죄를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각심을 줘서 죄를 회개하게 하고, 뉘우치게 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의 뿌리, 원죄, 죄악의 본성은 무서운 심판이 임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 인간의 모습을 보면 지옥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형벌의 무서움이 죄 자체를 없애주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을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벌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 목적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 이후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심판으로도 벗겨지지 않는 죄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창세기> 9장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는 후손들의 계보가 나오는데, 바벨탑과 홍수 심판 사이에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역사를 보여 주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일어날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구원받았던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음으로 자녀들에게 수치를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심판으로도 벗어지지 않는 인간의 죄성을 보여 줍니다.
세 자녀에 대한 노아의 예언
성경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성품을 오랜 시간 보였던 사람일지라도 그들 속에 숨어 있던 죄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성경이 일반 역사가나 사람들이 기록한 거라면 이 정도 사건은 그냥 넘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노아의 수치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홍수 심판 이후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에게도 죄가 다시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밭에 잡초를 다 뜯어 놓아도 어느 순간 다시 자라듯이, 심판 이후 노아의 마음에 어느덧 죄악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 수치스러움을 드러냈습니다.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사탄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들들에게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그 광경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22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발견하고 알렸다는 뜻이 아니라 속으로 즐기면서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말했다’는 단어에도 ‘매우 즐겨하면서 말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함의 모습에서 타락한 뱀 후손의 성품이 발견됩니다. 반면 노아의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셈과 야벳에게는 노아의 그 모습이 결코 즐거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여기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이후 자녀들에게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 자녀에 대한 노아의 예언’입니다.
성경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성품을 오랜 시간 보였던 사람일지라도 그들 속에 숨어 있던 죄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성경이 일반 역사가나 사람들이 기록한 거라면 이 정도 사건은 그냥 넘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노아의 수치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홍수 심판 이후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에게도 죄가 다시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밭에 잡초를 다 뜯어 놓아도 어느 순간 다시 자라듯이, 심판 이후 노아의 마음에 어느덧 죄악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 수치스러움을 드러냈습니다.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사탄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들들에게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그 광경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22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발견하고 알렸다는 뜻이 아니라 속으로 즐기면서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말했다’는 단어에도 ‘매우 즐겨하면서 말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함의 모습에서 타락한 뱀 후손의 성품이 발견됩니다. 반면 노아의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셈과 야벳에게는 노아의 그 모습이 결코 즐거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여기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이후 자녀들에게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 자녀에 대한 노아의 예언’입니다.
놀랍게도 그 예언은 역사 속에 실제로 성취됩니다. 신약의 역사를 통해,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노아의 가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 같은 한 사건이 어떻게 역사의 운명을 결정지울 수 있는가 싶습니다. 또 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의 후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출발점에서의 사소한 차이나 방향의 전환이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철도를 보면 철로가 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갈리는 지점에서는 두 철로가 바로 옆에 있지만, 가면 갈수록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군대에서 포탄을 쏠 때 각도가 조금만 오르거나 내려가도 탄착지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지는 것처럼,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차이가 세월이 흐를수록 어떤 차이를 가져오게 될지를 아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를 일으키는 선택인지 아니면 축복을 상속받는 선택인지를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 야벳에게 일어난 사건이 그들을 통해 번성하는 수많은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자손들에게 축복을 상속해줄 것인지 아니면 저주를 상속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우리의 사소해 보이는 행동과 사건이 한 가정의 미래, 더 나아가 역사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큰 가족의 조상일수록 작은 가족의 조상보다 큰 책임을 집니다. 고대 조상일수록 책임이 작다고 보는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더 큰 가족의 조상일수록 더 많은 자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반역과 불순종이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인류의 조상으로서의 행동이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큰 것입니다.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일들의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더 큰 책임, 더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노아의 예언,
영적인 계보의 역사
“그래서 노아는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나안은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돼 그의 형제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아가 다시 말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5~27절).
노아의 예언은 민족의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계보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셈, 함, 야벳이 어떤 혈색이나 혈통으로 민족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셈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 아들이 축복과 저주를 받는데, 모두 셈을 중심으로 받습니다. 26절을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의 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켜 주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이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셈이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인 계보의 역사
“그래서 노아는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나안은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돼 그의 형제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아가 다시 말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5~27절).
노아의 예언은 민족의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계보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셈, 함, 야벳이 어떤 혈색이나 혈통으로 민족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셈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 아들이 축복과 저주를 받는데, 모두 셈을 중심으로 받습니다. 26절을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의 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켜 주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이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셈이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부수고, 하나님을 반역한 반역자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노아의 후손 중에서 셈과 셈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경 역사도 셈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이 나오고, 유다가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의 후손으로 세상에 보내실 지를 아주 오랜 역사를 통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을 역사 속에 예언하셨고,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셈을 축복하며 찬송합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셈에게 열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셈에게 임해서 그의 계승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셈의 모든 자손은 아닙니다. 노아의 자손 중에서 셈에게 초점을 맞춘 것처럼, 셈의 후손 중에서도 아브라함,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서도 이삭, 이삭의 후손 가운데서도 야곱, 야곱의 후손 가운데서도 유다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축복을 상속받고 나누는 영적인 계보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자손 중에서는 셈, 셈의 후손 중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는 하나님 선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예언의 약속 그대로…
함의 후손에게는 저주가 주어집니다. 25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를 조롱했는데, 왜 함의 막내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자 장 칼벵이 해석한 것입니다. 함이 받은 형벌의 가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후손을 저주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극심하게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후손들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번영하느냐 혹은 가난한가가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나안이 셈이나 야벳보다 좋은 땅을 차지한 역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은 이 땅에서의 번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가나안이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되어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 특히 기드온 족속들이 여호수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종이 되지 않습니까? 또 그 땅이 진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예언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함의 행동에 나타난 죄의 씨앗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하나님이 아셨기에 노아를 통해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 예언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야벳도 셈처럼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7절).
야벳은 셈과 함께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야벳에 대한 축복도 셈의 장막 안에서의 축복입니다. 셈의 후손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의 장막에 열리고, 셈의 장막이 창대하게 되어서 야벳도 그 장막 안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역을 통해 셈의 장막이 열려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으로 들어오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셈의 후예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은 모두 야벳의 후예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셈의 장막이 확장되어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 안에 축복의 상속자로 함께 참여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의 약속 그대로…
함의 후손에게는 저주가 주어집니다. 25절을 보면 함이 아버지를 조롱했는데, 왜 함의 막내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자 장 칼벵이 해석한 것입니다. 함이 받은 형벌의 가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후손을 저주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극심하게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후손들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번영하느냐 혹은 가난한가가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나안이 셈이나 야벳보다 좋은 땅을 차지한 역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은 이 땅에서의 번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가나안이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되어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 특히 기드온 족속들이 여호수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종이 되지 않습니까? 또 그 땅이 진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예언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함의 행동에 나타난 죄의 씨앗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하나님이 아셨기에 노아를 통해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 예언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야벳도 셈처럼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그가 셈의 장막에서 살게 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다”(27절).
야벳은 셈과 함께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선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는데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야벳에 대한 축복도 셈의 장막 안에서의 축복입니다. 셈의 후손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셈의 장막에 열리고, 셈의 장막이 창대하게 되어서 야벳도 그 장막 안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역을 통해 셈의 장막이 열려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으로 들어오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셈의 후예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은 모두 야벳의 후예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셈의 장막이 확장되어서 수많은 야벳이 그 장막 안에 축복의 상속자로 함께 참여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노아가 왜 셈을 축복했습니까? 하나님이 셈에게 초점을 두신 것은 셈만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나만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얼마나 많은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이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라”는 고백은 셈만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셈을 통해서 세상을 축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셈을 축복하셔서 그의 장막이 넓게 펴짐으로 수많은 사람이 그 장막에서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축복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까지도 셈의 장막에서 다스림을 받고, 축복의 장막을 떠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스스로 내버려 두면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나안을 셈의 장막에 종으로 붙잡아 두심으로써 그 축복의 장막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창세기> 11장 후반부에는 데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가 상징하는 것은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셈의 장막이 넓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축복하셔서 열방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초청하는 약속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택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남들보다 나은 성품을 가져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보면 비열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셈의 후손 중에 영적 계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셈의 장막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것을 말씀했습니다.
“장막 터를 넓히고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활짝 펼쳐라.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네가 좌우로 터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네 자손이 뭇 나라를 차지하고 버려졌던 성읍들에 살게 될 것이다”(사 54:2~3).
셈족의 위대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셈의 장막이 넓어짐으로써 종의 신분인 가나안이든, 창대하게 된 야벳이든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종적인 구별과 차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 더 뛰어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택하셔서 그 민족만 축복하신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장막을 넓게 하심으로 더 많은, 모든 민족이 축복으로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만의 축복은 없습니다. 나만 누리는 복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장막을 넓게 하실 때마다 더 많은 영혼이 축복을 함께 상속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노아를 통해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시고, 셈을 축복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인생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장막 터를 넓히고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활짝 펼쳐라.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네가 좌우로 터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네 자손이 뭇 나라를 차지하고 버려졌던 성읍들에 살게 될 것이다”(사 54:2~3).
셈족의 위대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셈의 장막이 넓어짐으로써 종의 신분인 가나안이든, 창대하게 된 야벳이든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종적인 구별과 차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 더 뛰어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택하셔서 그 민족만 축복하신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장막을 넓게 하심으로 더 많은, 모든 민족이 축복으로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만의 축복은 없습니다. 나만 누리는 복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장막을 넓게 하실 때마다 더 많은 영혼이 축복을 함께 상속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노아를 통해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시고, 셈을 축복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상속받는 인생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홍수 이후 역사의 흐름을 이처럼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는 역사가가 세상에 있습니까? 온 세상의 역사를 이처럼 간결하게 말씀할 수 있는 분은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의 흐름을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주의 대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축복을 상속받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나안이든 야벳이든 먼저 택함을 받은 자의 영적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을 넓게 펼쳐 주실 때마다 열방을 축복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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