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반역의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킴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사탄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사탄과 인간 사이에 개입하셨고, 구원의 약속을 주셨고, 장차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과 회복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죄를 범한 바로 그날 죽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지, ‘바로, 즉시’ 죽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바로 죽지 않고 930년을 살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이들에게는 천년 가까운 시간도 한순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100세 시대가 얼마나 짧은 인생입니까? 하나님은 죽음의 집행을 930년 연기하셨습니다. 아담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와 타락한 바로 그날 육체적 죽음을 가졌다면 세계 역사는 끝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죽음을 연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인간은 일정 기간 수명을 다하면 죽을 운명을 갖게 되는 게 아닙니다.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 생애 전체에 걸쳐서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은혜로 즉시 죽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들은 바로, 즉시 죽었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는 물리적 죽음으로만 생각하면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육체적 죽음을 가져오게 한 근원적인 죽음은 바로, 즉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묶어 놓으신 것을 분리시키고 해체하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연합시켜 놓으신 것을 떼어놓는 죽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 하나님이 하나로 묶어 놓으신 모든 관계를 해체하고 분리시킨 죽음입니다. 이 분리와 해체로서의 죽음은 바로, 즉시 일어났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물리적 죽음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존재는 기계적으로 맞춘 게 아닙니다. 유기적인 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 실타래를 풀듯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찢어지듯이 고통 가운데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죽음,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하는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죽음, 자기 자신 안에 온전한 영혼으로 존재해야 하는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 한 몸이어야 하는 부부, 가정,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는 죽음, 더 나아가 자연과 하나 됨이 깨어짐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기후환경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죄의 심각성과 영향력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930년이라는 세월을 연장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최초의 살인 사건
<창세기> 4장에 그 최초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충격적인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4장에 나타난 사건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죽음의 소식, 폭력과 살인에 대한 소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폭력적인 살인이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전쟁과 수많은 살인에 이르기까지, 마약을 통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과거의 설화나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가족 간의 살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직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비록 타락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타락의 영향력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자신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가인은 땅에서 난 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오고 아벨은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제물로 가져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3~5절).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만 인정하셨기에 몹시 화가 나서 분노하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고개를 떨군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분노했다는 것이고, 반대로 ‘고개를 든다’는 것은 기쁘다는 표현입니다. <시편>에서 ‘고개 들어 주를 맞이해’라는 말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나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과거에는 ‘종류가 문제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합당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동물로 드리는 제사, 피의 제사를 드리도록 계시하셨는데, 가인이 따르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농사를 지어서 땅의 소산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농산물이 아니라 아벨로부터 양을 얻거나 매입해서 제사를 드렸어야 합니까? 또 한편으로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입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제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속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맞지만, 종류를 구분해서 받으셨다고 한다면 소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곡식의 일부를 제사로 받으셨다면 가인이 땅의 소산물로 예물을 드리는 것도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볼 때는 제물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마음의 태도 문제였다고 보는 게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과거에는 ‘종류가 문제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합당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동물로 드리는 제사, 피의 제사를 드리도록 계시하셨는데, 가인이 따르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농사를 지어서 땅의 소산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농산물이 아니라 아벨로부터 양을 얻거나 매입해서 제사를 드렸어야 합니까? 또 한편으로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입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제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속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맞지만, 종류를 구분해서 받으셨다고 한다면 소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곡식의 일부를 제사로 받으셨다면 가인이 땅의 소산물로 예물을 드리는 것도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볼 때는 제물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마음의 태도 문제였다고 보는 게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벨의 제물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양 떼의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제물로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기름진 것, 최상의 열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무엇으로 평가됩니까? 종류도 아니고 양도 아닙니다. 아벨은 양 떼를 많이 드렸기에 받으셨고, 가인은 적게 드렸기에 받지 않으셨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종류와 상관없고, 양과도 상관이 없는데, 상관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양 떼의 첫 번째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아벨의 마음에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땅의 소산물’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소산물의 일부’인데 그것은 첫 열매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며 나왔지만, 가인은 명목상의 신앙인으로 안 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소유 일부를 믿음도 없이, 감사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단 한번 태도를 가지고 문제 삼지 않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여러 번의 태도가 누적되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인의 마음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은 직후 그가 가진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만일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을 돌아보면 됩니다. 그것을 돌아보고 고치는 게 올바른 태도인데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자신이 옳다는 주장의 표시입니다. 가인은 옳고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신과 외식, 불신앙과 불성실함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은 드렸는데 받지 않으신 하나님이 문제라는 분노가 ‘고개를 떨구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이유가 합당합니다. 아벨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는 태도가 있었지만, 가인에게는 그러한 태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믿음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자녀에 대한 잘못된 소유 의식
가인이 어떻게 이러한 상태의 인간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가인의 문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중요한 힌트가 한 가지 나오는데, 이름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독일의 복음주의 신학자가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에 한 고백에서 그 힌트를 찾았습니다. 우리말에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가 아들을 얻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아들’은 ‘벤’, 즉 후손이어야 하는데 ‘이쉬’, 한 남자,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를 썼습니다. 보통 자녀를 낳으면 “내가 아들, 딸을 얻었다”, “내가 자녀를 낳았다”라고 표현하는데, ‘얻었다’고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영어 성경은 ‘a man’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아담을 남자로 설명할 때 ‘이쉬’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굉장히 신앙적인 관계의 표현인데, “내가 한 남자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감사의 고백이라기보다 그 아들을 또 다른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삼고자 하는 교만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들을 얻었다”라고 번역한 것을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고 번역하면 더욱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자녀에 대한 잘못된 소유의식이 가인을 만들었습니다. 가인이 자기중심적이고,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인간이 된 근원은 아담과 하와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죄성으로 인해서 일어난 자녀에 대한 잘못된 시각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소유의식입니다.
아벨의 이름 뜻은 ‘헛되다’, ‘허무하다’입니다. ‘한 호흡에 불과하다’는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매튜 핸리 목사님은 “하와가 가인을 낳은 것에 너무 도취되어 또 다른 아들의 출생에 대해서는 무가치, 헛된 것으로 여겼다”고 해석합니다. 잘못된 집착과 편애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가정에서 가인은 스타였고, 아벨은 엑스트라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아벨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이 시대에 가인이 어떻게 형성됩니까? 부모의 편애, 부모의 잘못된 소유의식이 가인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은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세상이 움직여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할 때 분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인이 두려워하는 이유 ‘불확실성’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구었느냐? 만약 네가 옳다면 어째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옳지 않다면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6~7절).
하나님이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질문하시고 경고하신다는 것은 돌이키게 하시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찾아오셔서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가지고 문 밖에 나갔을 때 그를 노리고 있던 죄가 그를 사로잡았고, 결국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떤 죄든지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하나님은 그가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셨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은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다른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무시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먼저 죽이지 않고는 그의 형제를 죽일 수 없다.”
가인의 살인은 단순히 한 사람을 죽인 살인을 넘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반란, 반역, 배신하고,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죽일 수 없기에 자신의 힘으로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자를 찾아서 죽인 것입니다. 그 대상이 아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대들며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너는 입을 벌려 네 동생의 피를 받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땅을 일궈도 다시는 땅이 네게 그 결실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너는 땅으로부터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이다”(11~12절).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결실이 없는 인생이 됩니다. 또 “땅으로부터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땅이 유리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다른 영혼을 해친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기에 땅도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는 했습니다, 수해와 산사태가 나기 전에 땅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땅도 운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무고한 피가 뿌려진 땅이 울부짖지 않겠습니까? 무고한 피가 흘려진 그 땅이 사람들을 저주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수많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수많은 무고한 피가 흘려진 땅의 저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질문하시고 경고하신다는 것은 돌이키게 하시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찾아오셔서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가지고 문 밖에 나갔을 때 그를 노리고 있던 죄가 그를 사로잡았고, 결국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떤 죄든지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하나님은 그가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셨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은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다른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무시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먼저 죽이지 않고는 그의 형제를 죽일 수 없다.”
가인의 살인은 단순히 한 사람을 죽인 살인을 넘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반란, 반역, 배신하고,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죽일 수 없기에 자신의 힘으로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자를 찾아서 죽인 것입니다. 그 대상이 아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대들며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너는 입을 벌려 네 동생의 피를 받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땅을 일궈도 다시는 땅이 네게 그 결실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너는 땅으로부터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이다”(11~12절).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결실이 없는 인생이 됩니다. 또 “땅으로부터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땅이 유리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다른 영혼을 해친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기에 땅도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는 했습니다, 수해와 산사태가 나기 전에 땅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땅도 운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무고한 피가 뿌려진 땅이 울부짖지 않겠습니까? 무고한 피가 흘려진 그 땅이 사람들을 저주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수많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수많은 무고한 피가 흘려진 땅의 저주일 수 있습니다.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자식이 가인과 아벨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창세기> 5장 4절을 보면 아담이 930년 살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손들이 있었겠습니까? 가인과 아벨은 대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 그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들이 첫 번째, 두 번째 자녀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후에도 930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번성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인을 해칠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가인 스스로의 생각일 뿐입니다. 누군가를 해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인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불확실성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 가인이 겪고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원인도 가인이 두려워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 혹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합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조사했더니 80%가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 있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실제 일어날 일을 염려하는 것은 1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의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아벨을 무자비하게 죽인 가인이 자신의 생명은 얼마나 끔찍하게 위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당한 억울함은 무시하면서 자신이 당한 작은 억울함은 매우 크게 여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의 모습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태도로 살면서 고난은 억울하다고 하나님을 탓하며 원망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한 표를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5절).
하나님이 왜 가인을 보호하셨을까요? 형벌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 무엇입니까? 땅에 유리하고 방황하며 땅의 저주를 받으며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가인을 해치면 하나님의 징벌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어야 권위가 바로 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도 가인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 살인, 질투, 시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가인이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창세기> 역사는 신화나 설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인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없다면 가인의 운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십자가로 제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내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믿음으로 내쫓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왜 가인을 보호하셨을까요? 형벌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 무엇입니까? 땅에 유리하고 방황하며 땅의 저주를 받으며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가인을 해치면 하나님의 징벌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어야 권위가 바로 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도 가인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 살인, 질투, 시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가인이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창세기> 역사는 신화나 설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인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없다면 가인의 운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십자가로 제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내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인을 믿음으로 내쫓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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