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모든 불행의 시작 (창 3:1~13)

새벽지기1 2023. 7. 28. 06:45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올바로 만드셨다면 왜 악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짜 악의 기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하나님에게 돌리고 싶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만물의 기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악의 기원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임을 증거하고, 악의 기원은 인간의 의도적인 반역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악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속에 창조된 인간과 천사의 반역에 의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악은 선에 대한 반역으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선한 질서에 대한 반란으로 생긴 게 악입니다. 악은 선에서 기원합니다. 그래서 악은 선에 기생합니다. 기생충처럼 어딘가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악은 놀랍게도 선에 기생합니다. 얼굴에 ‘나 악인이요’, 또는 이름표에 ‘나 악한 사람이요’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 악한 사람일수록 선한 사람으로 위장합니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려고 먼저 신뢰를 얻으려고 합니다. 신뢰가 있어야 범죄가 가능합니다. 성실함으로 속입니다. 믿을만한 모습, 착한 모습으로 위장합니다. 악한 자신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악이 선에서 나왔기에 선을 이용하지 않으면 악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선한 모습 뒤에도 악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선의 이면에도 악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서도 악한 의도가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사탄의 등장과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타락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인간 안에 있는 악의 모습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육체가 진화하듯이 도덕적 수준도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인간은 높은 수준의 도덕과 질서 의식에서 추락해서 갈수록 타락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고대보다 현대, 현대보다 미래의 죄가 더 교묘하고 잔인하고 심각해질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문제를 환경이나 유전적인 문제로 돌리고자 합니다. 환경이 나빠서 그런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완벽한 환경에서, 모든 것이 주어진 축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전적인 문제나 환경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환경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인류의 첫 조상들이 누릴 수 있었던 행복과 거룩,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가 심히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절정에 있는 인간이 저주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아름다움이 더러워지고, 평화가 깨어지고, 행복이 불행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은 모든 불행의 시작을 말씀합니다. 그 불행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반역에 영향을 미친 사탄이 처음 등장합니다. 아무 설명 없이 사탄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사탄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언제 생겨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탄이 존재한 시점까지 알 필요가 없기에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은 타락한 천사의 무리입니다. 사탄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전능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천사입니다. 사탄이 처음부터 흉측한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그도 선한 천사였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전직이 천사였기 때문입니다. 과거 자신이 행했던 역할을 통해서 선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습니다.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라고 하는데 두로 왕은 에덴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두로 왕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던 타락한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사탄의 타락을 계시한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수호천사로 지음을 받았던 천사, 하나님이 주신 지혜, 아름다움,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천사는 일종의 제사장 역할로서 피조물의 세계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교만했을 때 타락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천사의 교만한 의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할 존재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되었고, 인간을 반역의 대열에 참여시킨 사건입니다. 
<이사야> 14장에서도 바벨론 왕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 왕의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정체를 드러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다섯 가지 외침이 나옵니다.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보다 높이 세우겠다”, “북쪽 집회 산 위에 앉겠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갈 것이다”,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질 것이다.” 
당시 가장 높은 권세를 가졌던 이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면서 그 이면에 그들이 교만하고 타락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탄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그들과 한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의 존재에 대해 말씀합니다. 다섯 가지 사탄의 의지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의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사탄이 먼저 생겨났고, 그로 인하여 인간이 반역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의도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반란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사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단지 뱀으로 나올 뿐입니다. 지금의 뱀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뱀은 인간과 친숙한 관계였기에 경계심을 가지지 않게 하려고 이용했을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뱀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다가왔습니다. 사탄은 늘 변장해서 활동합니다. 자신을 늘 숨깁니다.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사탄에 늘 둔감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시대마다 늘 새로운 계략을 개발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뱀 뒤에 숨어 거짓을 행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늘 숨어서 거짓으로 공격합니다. 늘 같은 편인 것처럼 위장해서 공격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내가 너에게 악을 행하도록 가르쳐주겠다. 네가 죄를 짓도록 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멋진 삶으로 인도해 주겠다”, “내가 너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공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불의가 행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의 세 가지 공격 원리
사탄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공격해 쓰러뜨린 전략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공격 원리가 나타납니다. 
첫째, 의심(doubt)입니다. 사탄이 여자에게 “정말 하나님께서 ‘동산의 어떤 나무의 열매도 먹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느냐?”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참으로’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정말, 참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말은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나무의 열매도 먹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되지만 한 가지 나무열매만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라는 말로 의심을 불어넣을 때 여자가 혼동하게 됩니다. 그 답변을 보면 말씀에 대한 혼동과 왜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지 만지거나 건드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이 들어올 때, 사탄이 말씀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을 때 혼동하게 되고, 왜곡하게 되고, 결국 말씀을 부인하는 영적 세력을 거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창세기> 3장 4~5절을 보면 사탄이 부인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부인하고 거짓말로 불순종을 유도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출발은 의심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의심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그들을 의심해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의심은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적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의심을 지성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한편이 되지만, 타락한 자유 의지를 따라서 믿지 않으려고 하면 진화론이 더 옳게 보이고, 하나님의 창조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지적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의지적인 문제입니다. 의지로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지에 따라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을 향하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향하든지를 결정합니다. 의지가 타락으로 인해 무너진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의지에 전염된 것입니다. 악한 의지에 전염된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선한 의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여기서 ‘다하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성은 믿음의 한 영역일 뿐입니다. 다 알아야 믿는 것 같지만 믿고자 할 때 알아지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의지가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정보를 줘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타락한 의지가 사탄에게 공격을 받아 의심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국 불순종의 의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의심부터 출발합니다. 내 안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뿌리 깊은 의지적인 불순종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꺾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의도적인 불순종의 뿌리가 꺾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이 아니고는 뿌리 깊은 불순종의 의지가 꺾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욕망 그리고 분열
둘째, 사탄이 최초의 인간을 넘어뜨린 것은 욕망(desire)입니다. 선한 욕구를 악한 욕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삶의 패턴을 유심히 관찰해서 어떤 욕구가 가장 강한지를 관찰하고 그 욕구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 욕구가 채워져야만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게 합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6절).
배고파서 먹은 게 아닙니다. 타락은 배고픔의 욕구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닙니다. 배부름의 욕구에 기반한 다른 욕구입니다 교만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고, 지혜롭게 되고자 하는 욕구, 배고픔의 욕구보다 강한 욕구가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지혜의 욕구입니다. 그 지혜의 욕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 타락한 교만이 됩니다, 교만의 욕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C.S.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의 욕구가 다른 모든 죄보다 무서운 것은 다른 욕구는 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통해 일어나지만, 교만은 지옥에서부터 곧장 올라온다.”
교만은 만악의 시작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배고파서 짓는 죄가 있고, 배부른데도 짓는 죄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중한 죄일까요? 먹을 게 없어서 빵을 훔쳐 먹은 죄와 먹을 것이 풍족한데 짓는 죄는 다른 차원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선한 욕구를 거짓된 욕망으로 바꿉니다. 그 중심에 교만의 욕구가 있습니다.
셋째, 사탄은 분열(division)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심을 받아들이고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피하고 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자기 분열, 자아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타인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보았을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친밀감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줘서 먹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여자에게 질문했더니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타락의 순서를 보면 사탄이 먼저 타락했고 그 다음에 여자, 그 다음이 남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임을 추궁하시는 순서를 보면 뱀이 먼저가 아닙니다. 아담에게 먼저 책임을 묻습니다. 그 다음이 여자입니다. 뱀에게는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네가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저주 하십니다. 회복의 길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사탄은 그냥 지옥에 갈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회복을 원하시기에 “왜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책임을 추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을 회복시키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뱀, 여자, 남자 순으로 되었지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질문하시고 뱀은 저주하십니다. 
인간은 자연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 창조되었지만, 이제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자연과 부조화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반역입니다. 화초를 심으면 화초만 자라지 않고 잡초가 항상 옆에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알곡을 심으면 항상 가라지가 옆에 붙어 있습니다. 인간은 늘 자연의 역습과 반역 속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관계의 축복이 분열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우리는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교육과 문화와 교양으로 감췄을 뿐이지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자기 분열 속에 존재합니다. 자아 분열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상 최악의 선택을 통해 죄와 악이 들어왔고,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의 완전한 조화가 깨어졌습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의 동산이 저주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택은 우리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들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죄도 있지만 우리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변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악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짐 받고, 원죄의 영향력으로부터 구원받고, 동산의 축복이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의심이 믿음으로 변하고, 우리의 욕망이 선한 뜻에 쓰임을 받고, 모든 분열이 다시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행복의 시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행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려면 <창세기> 3장에 나타난 불행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신화나 우화처럼 보입니까? 얼마나 우리 삶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적용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선한 하나님의 창조를 반역한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직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날마다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