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창조의 완성, 안식 (창세기 2:1~3)

새벽지기1 2023. 6. 30. 06:25
천지창조는 7일째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마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일간의 창조를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만물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질서를 안식을 창조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완성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1~3절). 
‘일곱째 날에 다 마치셨습니다’라는 단어가 세 구절에서 세 차례 반복되고, ‘모든 일’이라는 단어도 세 번 반복됩니다. 6일간의 창조를 통해서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완성하셨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안식을 통해서 일곱째 날을 창조 완성의 날로 세우셨습니다. 일곱째 날 안식의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이 그분의 목적과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창조질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로 피곤해서 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식이 필요 없으신 분이 안식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창조질서를 알려주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피조세계까지도 안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움직여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 창조의 마지막 완성이며, 하나님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허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작품이다.”  
안식은 하나님 창조의 마지막 작품이자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이 누리신 안식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강, 기쁨, 평화, 샬롬, 조금도 갈등이나 부조화가 없는 기쁨에 모든 피조세계가 참여하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6일 간 창조 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하셨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통해서 누리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안식, 복되게, 거룩하게
일곱째 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첫째, 안식하셨고, 둘째, 복되게 하셨고, 셋째,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은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이 곧 복이며, 복이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복이며, 곧 복은 안식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초로 거룩하게 구별하신 게 공간이 아닙니다. ‘7일째’라는 시간입니다. 거룩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카도쉬’는 <창세기>에 단 한 번만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구절에서 단 한 번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6일간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6일 간 그 어느 날에도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7일째, 7일이라는 날을 거룩하게 하셨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의 안식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에 중요한 창조질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아야 하고, 피조세계도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질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6일 창조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되게 하나님의 목적대로 존재하게 되려면 일곱째 날의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6일간의 창조는 선(善)이며, 7일째 날은 성(聖)입니다. 선의 완성은 거룩함에 달려 있습니다. 처음 여섯 날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7일째 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만물의 질서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공간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시간을 마음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우리가 멈출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만물은 그저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여러 변화 과정을 거치지만,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 때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구별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구별하기보다 공간을 구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종교가 신이 어떤 공간에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신전을 만듭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어떤 공간에 가야만 그들이 믿는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항상 신은 어디에 있는지, 그 신이 있는 공간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안식을 창조하시고, 제7일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공간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구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기 때문에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구별하지 않으면 어디에든 계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허쉘이라는 신학자는 영원을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에든 계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별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을 구별하지 않고 공간을 어떤 특별한 장소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도 성막을 만드시고, 성전을 만드시고, 거룩한 곳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일시적으로 인간에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한적으로 정한 곳에서 만나게 하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하나님이 맞춰 주신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하나님이 모두 폐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소적인 성소가 아니라 시간적인 성소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공간 중심의 세계관에 빠져 서 시간을 구별해야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 인간에게 창조질서에 따른 삶의 패턴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십계명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삶 전체 틀을 창조질서에 맞추라!
“너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6일 동안은 네가 수고하며 네 일을 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 너나 네 아들딸이나 네 남녀종들이나 네 가축들이나 네 문안에 있는 나그네나 할 것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마라. 여호와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 주고 거룩하게 했다”(출 20:8~11).  
“6일 동안은 네가 수고하며 네 일을 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쉬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일요일 성수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곱째 날이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이라는 사회의 요일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었을 때 하나님이 7일째라고 하신 것은 어떤 날로 시작하든지 7일 중의 하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완성하게 하는 시간적인 성소를 하나님을 위해 구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곧 주일성수라는 역사적 흐름이 있었는데 아닙니다. 토요예배에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예배의 날로 지키는 것은 역사적 혁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일요일 성수를 주일성수라고 고집하던 또 하나의 잘못된 율법주의를 뛰어넘어서 여러분들이 창조질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요일에 이름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든 것입니다. 이 패턴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 창조의 완성인 안식을 우리의 삶과 사회의 질서 주기, 일과 안식의 주기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삶 전체의 틀을 창조질서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7일 중에 하루의 시간을 시간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공간을 마음대로 주관하며 살 때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7일마다 하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창조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날을 정함으로써 나머지 6일도 하나님의 시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듀크대학의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라는 학자가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안식일이란 단지 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전히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세상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
    
둘째,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안식해야 할 하루에 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 경제적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내가 일해야 살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하루의 안식은 내 능력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사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만나가 내릴 때 안식일 이전에는 두 배의 양이 내렸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이 두 배의 공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실험해 보십시오. 장 칼벵(John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식일의 영적 본질과 목적은 인간이 마치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자기 일에서 떠나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안식일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6일 간에 힘써 일하는 노동과 하루의 안식이라는 패턴으로 구성됩니다. 6일간 힘써 일하지 않는다면 하루 안식한다고 해도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은 삶에 단순한 쉼표가 아니라 삶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기 위해 안식한다는 게 아니라 안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이 세상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인류 첫 조상이 무죄한 상태에서 이 패턴을 지키며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죄가 가장 먼저 깨뜨린 게 안식입니다. 안식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시편> 95편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불순종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죄와 불순종은 언제나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안식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4장 전체가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3절의 안식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안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하게 된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창조의 안식 회복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창조의 안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창조 안식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창조를 통해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에 우리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을 제가 요약한 말씀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그렇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할 것이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왜 복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사람이 왜 복이 있습니까?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해 우리가 들어가게 될 상태를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안식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일 간의 창조와 하루의 안식이 이 땅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의 패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내다보며 이 땅에서 수고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일과 안식의 주기를 잘 지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복된 삶,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 안식하시고 복되다 하시고, 거룩하다고 하신 것처럼, 7일 중 하루를 하나님 앞에 시간을 내어 드리고, 구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