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동산의 두 나무 사이에서창 2:4~17

새벽지기1 2023. 7. 8. 07:31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6일째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장에 이르러서 다시 한 번 인간 창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 창조가 두 번 기록된 것을 보면서 성경을 비평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자료가 편집된 것으로 보고 성경을 다시 해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창조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6일간의 창조 가운데 창조된 인간도 피조물’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 2장에서는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창조된 존재’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는데, 2장에서는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임재하시며,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이 인간과 교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모든 세계가 인간보다 앞서 창조된 것을 보여줬다면, 2장에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존재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서 취하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됐습니다”(7절).
다른 생명체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토기장이가 되셔서 흙을 손수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물질인 흙으로 빚어졌지만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음으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성상 물질 이상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오랜 시간 진화를 통해 동물로부터 나온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동물계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물의 몸과 형체를 인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동물은 인간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모든 동물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을 잘 들여다보면 동물의 생태계가 이해되고, 인간을 이해하면 동물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과 생물의 생태계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반려동물의 심리를 깨달아서 그들의 행동을 교정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것도 인간을 이해하는 이해력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피조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동물을 인간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물과 인간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은 진화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인간이 먼저였습니다. 인간이 먼저고 동물이 그 다음이었지만, 나온 순서는 동물이 먼저고 나중에 인간이 나왔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아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귀가 없을지라도 들으시는 분이고, 우리와 같은 눈이 없으셔도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편> 94편 9절에서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형상의 기능을 인간에게 넣어주셨기에 듣고,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생기, 곧 호흡을 인간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넣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으로 다른 어떤 피조물과 다르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과 하나님의 의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손수 빚으신 그 사람을 거기에 두셨습니다”(8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셔서 동산을 일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15절). 
성경을 비평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은 ‘엘로힘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E문서고, 2장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J문서라고 합니다. 다른 루트로 왔기 때문에 다시 분류해야 한다며 성경을 해체시킵니다. 매우 위험한 자유주의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인간을 돌보시고, 인간과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두 가지 면에서 지구 전체의 나머지 세계와 구별됩니다. 첫째 ‘동쪽의 에덴’이라는 표현을 보면 지구 전체가 에덴동산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동쪽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한 방향, 한 지역에 세워진 장소입니다. 둘째, 타락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다른 쪽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지구 전체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자연의 상태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조화로운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지구와 또 구별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지구상의 어느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정원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네 개의 강이 힘차게 흘러가는 규모였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지명들이 나옵니다.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네 개의 강이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입니다. 비손과 기혼은 오늘날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지역이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아직도 남아 있는 이름입니다. 이라크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강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명이 맞는다면 그 어딘가에 실제 있었던 한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창조의 공간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먹고 노는 공간이 아니라 기쁨으로 노동하는 장소였습니다. 에덴이라는 이름도 기쁨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 <창세기> 2장 5~6절을 보면 그때 지구의 상태가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안개가 땅에서 솟아 나와 온 땅을 적셨습니다.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해로운 대기의 변화, 불규칙한 대기의 변화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나오는 열매도 독성이 있는 열매가 없었고, 상처를 입히는 가시나 엉겅퀴가 없는 모든 것이 파괴되지 않은 조화로운 상태이자 아름다운 상태였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시는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그 동산을 거니시며 인간을 찾으시고 말씀하시며 대화하시는 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어떤 의도가 있습니까? 이 동산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이 지구 전체를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에덴동산 밖에 있는 수많은 땅을 또 다른 에덴, 더 나은 에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가는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생명나무의 의미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일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동산의 축복을 누리며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긴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온갖 나무가 땅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9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16~17절). 
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 좋은 수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두 개의 특별한 나무를 부각합니다. 다른 나무들과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특징입니다. 하나의 나무는 ‘생명나무’라 일컬어졌고, 또 다른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불렸습니다. 두 개의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는 인간의 존재와 관련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의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을 크게 두 존재로 나누면 육체와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육체의 영역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는 영혼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영혼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된 존재인 것처럼, 이 두 나무의 목적도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측면을 부응합니다. 한 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생명나무라고 하고, 또 다른 나무는 영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의식, 지식, 영혼을 지탱해주는 나무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지식의 나무, 양심의 나무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동산의 다른 나무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고, 자연적 생명을 지탱하는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배고픔만 해결해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생명나무는 단순한 자연적, 물질적 몸을 지탱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몸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시켜 가는 목적을 위해서 기획하셨습니다.  아담의 몸이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하와가 없는 상태입니다.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죄는 없으나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언젠가는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지만 타락할 수 없는 상태, 죄를 짓지 않고,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인간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만 먹었더라면 죽음을 겪지 않고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변화되어 갔을 것입니다. 어떻게 나무가 그 기능을 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신학자는 생명나무의 특징을 알려면 정반대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가시 엉겅퀴를 내는 저주받은 땅의 상태입니다. 독성을 가진 나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통제, 소염제 같은 많은 약이 나무의 독에서 추출되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고, 생명을 지탱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생명의 뿌리에 영향을 줘서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역할이 나무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단순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인 생명의 뿌리에 영향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단지 지탱하는 의도가 아니라 더 높은 능력, 다른 차원의 상태로 옮겨주시려는 의도로 하나님이 기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 이후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그 영향력이 더 깊어지고, 더욱 하나님을 대항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일반적인 나무가 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출발선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성장이 필요 없고, 어떤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성장과 변화를 해야 하는 인간으로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두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
또 하나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16~17절). 
하나님이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를 직역하면 “너희는 죽음으로써 죽을 것이다”입니다. 이것을 ‘반드시’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열매에 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을 지킴으로 누려지는 영적 생명을 잃게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에 주어진 금지 명령은 영적 생명과 관련된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가리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금지된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영적 상태가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창조 직후 인간에게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기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내가 잘못했구나. 옳지 않구나’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가 없을 때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규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심을 따라 판단한다고 하지만, 그 기준이 모두 다릅니다. 인간의 양심은 상대적입니다. 자신은 양심이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양심 없는 삶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양심을 합리화하고 살아갑니다. 
죄가 없을 때는 양심도 필요 없는 상태였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의 인간은 양심을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사는 존재였습니다. 믿음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믿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고 변화되어야 하는 상태입니다. 동물도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단순히 몸만 커지는 게 아니라 영혼과 영적 생명과 육신의 생명 상태까지 계속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한 관계로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 출발선에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계속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먹지 않고, 자유롭게 먹으라고 하신 것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허용하고 단 한 가지를 금지하는 것이 과연 인간을 얽매는 것일까요? 왜 한 가지만 금지하셨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이상이면 헷갈렸다고 변명할까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 금하신 것만 하지 않으면 성장의 상태가 인간에게 계속 주어졌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성장을 하거나 역행하는 성장을 하거나 둘 중 한 방향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성장이 필요 없고, 시험도 필요 없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스스로 주권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험이 필요했습니다. 시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을 통해 성장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양심도 필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만 했으면 계속 성장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먹지 말라 금지 명령을 통해 의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날마다 서는 것입니다. 동산 중앙 한 가운데 세워진 그 나무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엄청난 통치권이 자신의 권위가 아니고 하나님이 맡기신 권위라는 것,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분이 계신다는 것을 날마다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순종을 선택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나무를 날마다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을 성장시키고자 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는 거룩한 성화와 영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이 받은 이 명령은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홀로 있을 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선택과 행위가 모든 인류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잘못이지만 그것은 모든 인류의 잘못으로 전가되는 행위입니다. 
동산 중앙에 세워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피조물 중에 가장 나은 존재로 지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는지 그 기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직후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수준, 더 영광스러운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셨습니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뿐만 아니라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음으로써 영과 혼과 육이 영광스러운 변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계속 죄가 들어올 수 없는 영혼으로 성장해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금지된 명령을 어김으로써 악을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선과 악을 인간은 알 필요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양심도 필요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재판관이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느낄 필요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을 의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동산의 두 나무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만일 이 말씀을 잘 지켰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수치심도, 두려움도, 불안도, 미움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반대의 성장을 선택했습니다.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두 나무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은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두 나무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은 포기되거나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 충만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좋은 것 중에서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동산에 있었던 그리스도 앞에는 악한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했습니다. 두 나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충만하게 이루어지도록 모든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이 두 나무를 통해 주시고자 했던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는 자였지만, 이제는 그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가 강 좌우에 있습니다. 그 동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습니다. 다시는 시험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나무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아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는 시험이 필요 없습니다. 시험이 필요 없으니 죄도 없고, 양심도 없습니다. ‘양심이 없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게 아니라 양심이 필요 없고,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해도 되는 영광의 상태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변화시킨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