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인간의 창조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 해와 달과 별, 식물과 동물의 창조는 아주 간략하게 서술할 뿐입니다. 천사의 창조는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방식까지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창조가 피조 세계에 면류관과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는 그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삼위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 지를 의논하셨습니다. 그 결정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의 창조와 그 의미
<창세기> 2장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흙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방법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6일째 땅의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형상과 모양은 다른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의 병행법으로 같은 단어를 다시 반복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두 단어를 분리시켜서 ‘형상과 모양은 다른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양은 파괴되었지만 형상은 남아 있다’ 등 많은 해석이 있지만, 같은 의미의 단어를 반복한 것뿐입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나님 창조의 걸작으로 역사에 등장했을 때 이미 인간의 모든 특성과 활동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과 의지, 합리성과 양심, 사상과 언어, 도덕과 윤리, 결혼과 가정, 문화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이 처음부터 존재했습니다.
계속 창조론과 반대되는 진화론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 진화론은 인간의 초기 시대에는 유인원의 단계에서 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인간의 특징이 없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다세포에서 생물체로, 생물체에서 원시 유인원 단계에 이르렀으니 사고력, 문화, 문명, 공동체가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더딘 속도로 동물적인 야생 상태에서 현대적인 문화 수준으로 발전된 진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오랜 시간,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원에 관한 물음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볼 때 매우 느린 화면으로 보든, 빠른 화면으로 보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주 느린 기적이나 빠른 기적이나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믿는 사람은 기적이 빨리 이루어져도 믿는 것이고, 느리게 이루어져도 믿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른 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 빠르게 만들어졌든 느리게 만들어졌든 그 속도는 기원과 상관 없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더디게 진행되었다는 말이 우리가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 메커니즘’입니다. 거기에 숨는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루이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에게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문학가이자 저널리스트 체스처 턴(G. K. Chesterton)이 선사 시대 인간이 동굴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증거로 책을 썼습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쓴 책입니다. <영원한 인간>(The Everlasting Man)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진화를 비판하고 창조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창조의 시각으로 인류의 문명을 훑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초기, 문명이 시작되었을 시기에 인간이 했던 일이 동굴에 나타납니다. 동굴에 나타난 흔적은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흔적은 벽화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선사시대 유물이 나오는 동굴 속 벽화들이 발견되고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 라스코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벽화도 있고, 스페인의 알타미라는 곳에서 발견된 동굴벽화도 유명합니다. 이 그림들을 진화론적 시각에서는 초기 사람들이 그렸다고 하는데 정말 잘 그렸습니다. 원숭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인간이 마무리한 게 아닙니다. 원숭이는 그림을 서툴게 그리고 사람이 영리하게 그린 게 아닙니다. 원숭이가 표현 예술을 시작하고 사람이 이를 완성시킨 게 아닙니다. 원숭이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그림을 시작조차 하지 않습니다. 유인원은 사람을 유치하게 그렸고, 그 이후 인간이 멋지게 그린 게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이 유인원의 단계를 벗어난 직후 선사시대 그림이 이정도로 훌륭하다면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입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중요한 증거가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남겨진 게 동굴의 벽화, 예술입니다. 그들이 기록으로, 문서로 남겨놓지 않고, 어떤 물건으로 남겨놓지 않아서 우리는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미개한 시대라고 말하는데 착각입니다. 원시시대에도 훌륭한 예술이 있었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 이집트, 남미에 쿠스코 같은데 가면 엄청난 도시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도시를 건설했을까? 그 시대에도 오늘날에 상상할 수 없는 건축 기술이 있었고, 예술 감각이 있었고, 탁월한 수준의 문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개인들이 아닙니다. 미개함과 문명은 언제나 세상에 나란히 공존해왔습니다. 현재에도 문명이 있는 것처럼 그때에도 문명이 있었고, 이 시대에도 미개함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미개함이 있었습니다. 미개함이 시간이 오래 흘러 문명으로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식물과 동물들을 처음부터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은 동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의미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직후 종류대로 창조된 인간이 죄가 없는 상태,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태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인 토머스 보스턴이 <천국을 보게 될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인간의 네 가지 상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원래 의도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인간이 스스로 타락함으로써 처하게 된 부패한 본성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음으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모든 자를 심판하시는 분에 의해 거하게 될 각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무죄한 인간의 본질이 어떤 상태인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죄가 없는 상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첫째,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철저히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되어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동굴의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자체가 걸작일 뿐만 아니라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력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만들어 개발할 수 있는 창조력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재료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함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셋째,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신 것을 행하시고 그것을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평가해서 발전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가장 많이 인정받는 해석은 ‘인간은 이성으로 사색하는 존재’입니다. <팡세>에서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우리들의 모든 존엄성은 생각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자신의 품위를 높여야 할 것은 이 생각에 의해서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수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갈대 같은 존재입니까? 다른 동물들은 알아서 잘 자랍니다. 일부 부모가 돌봐주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알아서 큽니다. 그러나 인간이 낳은 아기는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장 연약한 갈대 같지만,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위대한 존엄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의논하시고, 결정하시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결국 보시기에 좋았다고 평가하셨습니다. 평가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알려 줍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우리들의 모든 존엄성은 생각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자신의 품위를 높여야 할 것은 이 생각에 의해서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수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갈대 같은 존재입니까? 다른 동물들은 알아서 잘 자랍니다. 일부 부모가 돌봐주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알아서 큽니다. 그러나 인간이 낳은 아기는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장 연약한 갈대 같지만,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위대한 존엄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의논하시고, 결정하시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결국 보시기에 좋았다고 평가하셨습니다. 평가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알려 줍니다.
넷째,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삼위하나님께서 의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관계성이 있습니다. 삼위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도 관계 안에서 인간다움을 가집니다. 참된 인간다움은 관계성이 있습니다. 오직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만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며 공동체를 이룹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공동체 안에서 번성하고,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된 이유입니다.
다섯 번째, 인간은 대리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려고 했을 때 “그들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존재로 통치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땅에 가득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문화명령입니다. 정복하라는 명령은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화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여섯 번째,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전도서> 7장 29절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정직하게 지으셨다’는 의미는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에 거치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로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영혼을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창조하심으로 도덕적으로 의로움이 계속 시험을 통해 온전함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정직하게 지으셨다’는 의미는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에 거치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로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영혼을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창조하심으로 도덕적으로 의로움이 계속 시험을 통해 온전함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일곱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모험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험에 의해 탄생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 또한 모험적입니다. 인간에게 모험심이 없다면 발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를 세운다는 것 자체가 모험입니다. 피조물을 통치할 능력을 주신 것도 모험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유의지란 순종할 자유와 배반할 자유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주신 것은 인간이 과대망상에 빠져서 하나님의 경쟁자로 자처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지을 가능성까지 각오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모욕당할 것까지 각오하셨습니다. 왜 이런 모험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선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신 게 아닙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 장차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을 일곱 개의 존재와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 아래 있는 존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철저히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할 때 인간의 능력이 계속 개발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고자 할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 존엄성의 절정은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아시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시편> 139편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3~18).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가 모태에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셨고,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형태를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한 생각이 어쩜 그렇게 많고, 보배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형체를 이루지 않은 때에도 온전한 형상으로 보고 계셨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고, 내가 언제 태어날지 알고 계셨으며, 나의 달란트를 알고 계시며, 나를 향한 보배로운 수많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때 우리를 도구로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시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를 향한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래알보다 많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귀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창조를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의 존귀함을 얼마나 기뻐하며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날마다 느끼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3~18).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가 모태에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셨고,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형태를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한 생각이 어쩜 그렇게 많고, 보배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형체를 이루지 않은 때에도 온전한 형상으로 보고 계셨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고, 내가 언제 태어날지 알고 계셨으며, 나의 달란트를 알고 계시며, 나를 향한 보배로운 수많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때 우리를 도구로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시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를 향한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래알보다 많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귀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창조를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의 존귀함을 얼마나 기뻐하며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날마다 느끼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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