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늘에 새겨진 언약 (창세기 9장 1~17절)

새벽지기1 2023. 9. 2. 06:48
노아 시대에 일어난 전 세계적인 홍수 심판은 설화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환경은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 변화된 세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극한 환경, 사막이나 고원지대, 북극과 남극, 밀림으로 우거진 지역이 있는가 하면, 몽골 고원 같이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지역 있습니다. 지극히 제한적인 곳에서만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깊은 계곡을 보면 세 가지 지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지층이 있고, 엄청난 대격변으로 인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지층이 있고, 가장 위에 퇴적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지층이 있습니다. 화석들은 가장 위에서 발견되지 않고 중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됩니다. 무엇인가 큰 격변이 일어나서 그 순간에 멈춰버린 것 같은 화석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생물체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듯한,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물의 흐름에 의해서 형성이 될 수밖에 없는 지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환경이 언젠가 있었던 대격변으로 인해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 세계적인 홍수 심판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창세기> 7장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물이 쏟아졌을 뿐만 아니라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합니다. 지진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지층의 변화로 인해서 아래로부터 물이 솟구쳐 올라 지구에 엄청난 대격변으로 인한 환경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격변의 변화로 인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던 환경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변화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과 조화를 이루었던 야생 동물들도 본성이 변화해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그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을 너희 손에 준다”(2절). 
홍수 심판 이후 여덟 명만 생존했는데, 많은 생물이 인간을 해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통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덟 명밖에 남지 않은 인간들이 나머지 생물들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인간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었습니다. 지구환경 변화로 인해서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육식도 허용됩니다.
“살아 있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푸른 채소와 같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나 고기를 피가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 피에는 생명이 있다”(3~4절). 
하나님이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지구환경 변화 때문입니다. 채소가 자라지 않는 북극이나 사막 지역에서 어떻게 채소를 먹겠습니까? 물론 과학 기술이 발전해서 사막에서도 딸기를 재배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채소를 재배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육식밖에 할 수 없습니다. 기후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양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피가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 때문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 사회의 특징은 폭력이었습니다. 잔인함이었습니다. 이제 엄격한 보응의 법을 세우심으로 폭력이 억제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피를 흘리면 반드시 값을 치를 것이다. 그것이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 그 피에 대해 값을 치를 것이며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 사람에게도 그 피에 대해 값을 치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에게 피 흘림을 당할 것이다”(5~6절).
하나님이 개인적 복수를 지시하신 게 아닙니다. 누군가 피를 흘리게 하면 똑같이 앙갚음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공적 권력을 통해서 공의의 칼을 집행하는 일종의 정부 기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죄를 억제하는 도구로써의 공권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앙갚음 하라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않게 하시고, 공적인 기관의 공의로운 법집행을 통해서 악을 제어하는 게 공권력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고, 하나님이 국가 기관에 명하신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하면 나머지 부분은 자유롭게 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여러 영역에 나눠 주셨습니다. 가정의 영역, 교육 기관의 영역, 기업과 상업의 영역, 국가의 영역,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권위를 나눠주셨습니다. 공권력의 기능은 악에 대한 보응, 악이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공의로운 칼을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대격변이 일어난 사회에 하나님이 악을 제어하기 위한 모습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계획과 목적은 변화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라’”(1절). 
“너희는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라. 땅에서 수가 불어나 땅에서 번성하라”(7절).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명령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창조의 명령을 그대로 반복하십니다. 물론 노아가 둘째 아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노아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인류의 시조이지, 둘째 아담은 아닙니다. 둘째 아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인간은 인류에 두 사람 뿐입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 둘 중 한 사람에게 속합니다. 구원은 첫째 아담에게서 둘째 아담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것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 둘째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 의인이 됩니다. 노아는 두 번째 인류의 시조로서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계획의 명령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또 변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인간에 죄성입니다. 홍수 심판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창세기> 11장에 이르러 바벨에서 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심판이 인간의 죄성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공의로운 심판과 벌은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악이 사라지게는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구속의 은혜, 십자가 보혈의 용서, 십자가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베푸셔서 불순종한 이들을 순종하는 이들로 바꾸시고, 배반하고 타락한 이들을 죄로부터 건지십니다. 심판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죄를 하나님 독생자의 십자가 은혜로 죄로부터 건져 주시고, 죄와 악을 씻으시는 역사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완전히 진멸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전에 인간을 만나셨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셔야 했습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자유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하신 금지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그 행위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와 맺으신 언약을 학자들은 ‘행위 언약’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홍수 심판 이후 심판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 심판으로도 죄성이 변화되지 않는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건지시고,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성경에 “언약을 맺었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노아와 맺은 언약 이후 언약을 가리켜 ‘은혜 언약’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다”
“보라.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올 너희의 자손과 언약을 세운다”(9절). 
성경에 처음으로 ‘언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언약은 믿을 수 없는 상대끼리 맺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약속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신실하신 분인데 무슨 약속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인간, 믿음이 없는 인간,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이 은혜로 대하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주시고, 용서와 의롭게하심과 회복을 통해 죄로부터 건져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믿음으로 따라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조차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여덟 명만 생존한 것을 보면 인간에게 얼마나 믿음이 없는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인간에게 심어주셔야 합니다. 믿음조차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하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깨달음이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모습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우리가 들을 때, 믿음을 가질 때 십자가에 나타난 새 언약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고, 심판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죄가 하나님 은혜로 씻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중요합니까? 종교개혁자 칼뱅도 <기독교강요>를 쓸 때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에 쓴 <창세기 주석>에는 노아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쓰고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깊이가 있을수록 노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특히 <창세기> 9장을 깊이 연구하면 우리가 사는 환경도 홍수 심판 이후 환경이며,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를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워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로 인해 멸절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이 땅을 멸망시키는 홍수가 없을 것이다”(11절).
이 말씀을 “다시는 심판이 없을 것이다”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시는 홍수로 모든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홍수가 나서 침수되었다가 물이 빠진 모습이 얼마나 참혹합니까? 그런데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가 그들이 다시 배 밖으로 나왔을 때 모습을 보고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 명령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그 공포와 두려움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물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바다를 항해하고, 신대륙을 탐험하고, 바다 속을 연구하겠습니까? 세상을 통치하는 인간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자연의 법칙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의 존재,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배재하고 세상을 보면 자연이 신이 되고, 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연신론’을 만듭니다. ‘디즘(Deism)’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긴 했지만 창조 이후에는 자연의 법칙처럼 돌아간다고 주장합니다. 잘못된 사상입니다. <욥기>말씀처럼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이 물을 통제하고 계시며, 해와 달과 별들이 지구의 모든 만물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자연세계의 법칙을 붙드시고, 법칙을 행하고 계십니다. 
“땅이 존재하는 한 씨 뿌리는 것과 추수하는 것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창 8:22). 
추위가 있고 더위가 있습니다. 물론 어느 지역은 더위만 있고, 어느 지역은 추위만 있지만, 추위와 더위가 함께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여름이 있는 지역, 겨울이 있는 지역, 낮과 밤이 교차되는 자연의 법칙들이 홍수 심판 이후 인간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모든 일에 작용합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 빛이 고통스럽지만, 식물에게는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하나님이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등 모든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자연 질서를 보존하는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누리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누리는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들을 보존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이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는 이들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대격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설명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평안해 보이는 기간, 안정적인 기간, 지구환경의 보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구원의 방주되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간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와 너희 사이에, 또한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내 언약의 증표다. 내가 구름 속에 내 무지개를 두었으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시가 될 것이다. 내가 땅 위에 구름을 일으켜서 그 속에 무지개가 나타날 때 내가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생물들 사이에 세운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 물이 홍수가 돼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과 이 땅 위의 모든 육체 사이에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와 이 땅 위의 모든 육체 사이에 세운 언약의 표시다’”(12~17절). 
무지개는 하나님 은혜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무지개는 비구름과 태양빛의 혼합물입니다. 인간 죄의 먹구름에 하나님 은혜의 빛이 비칠 때 은혜의 색깔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십자가 은혜가 인간의 어두운 죄를 뚫고 임할 때  은혜의 색깔이 어떤 사람에게는 화해로, 어떤 사람에게는 용서로, 어떤 사람에게는 평화로,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지개가 하늘과 땅에 걸쳐져 있는 것처럼,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요, 하늘에 새겨진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도록 하늘에 걸린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며, 십자가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지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서곡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무지개입니다. 안타깝게도 무지개가 지금은 ‘LGBT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상징들, 단어들을 모두 뺏겨 버린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구원’이라는 중요한 단어는 구원파가 가져가고, ‘영생’은 영생교가 가져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신천지가 가져가고, 도대체 남아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무지개는 하나님 은혜의 상징입니다. 인간 죄의 먹구름을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혜 빛이 우리 모두에게 다양한 은혜로 임합니다. 
여러분, 무지개는 하나님이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인입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여전히 인내하시고, 인애를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증거자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