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다 (창세기 11:1~9)

새벽지기1 2023. 9. 17. 06:05
홍수 심판 이후 역사는 인간의 죄가 심판으로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 11장에 이르러 인류 전체의 타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과 마찬가지로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한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는데, 인류는 또다시 홍수 심판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1장 2절을 보면 인구가 다시 크게 증가해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메니아 고산 지대에 머물렀고, 고산 지대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평지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부만 이동한 게 아니라 당시로 보면 인류 전체가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 이동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하나였고, 단일 민족처럼 함께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성경에서는 ‘시날 평원’, ‘시날 평지’라고 밝힙니다. 이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넓은 평야로서 과거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은 훗날 바벨론으로 알려질 지역입니다. 그들은 이 평지에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았습니다. 단지 탑만 쌓은 게 아니라 도시와 성을 건설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살 때는 주로 나무를 사용했지만, 평지로 내려왔기 때문에 벽돌을 이용해서 건축했고,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
“그리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성을 쌓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우리를 위해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4절).
이 고백 속에 세 가지 죄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했습니다. “자, 우리가”라는 표현은 그들이 하나 되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하나 됨이 아니라 죄로 인한 잘못된 하나 됨입니다. 당시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 죄의 무서운 힘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죄도 인간을 하나 되게 합니다. 죄가 연합해서 하나 되는 힘을 이루면 사탄이 인류 가운데 역사하는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거하고, 온 인류를 무신론의 공동체로 묶고자 하는 무서운 죄의 연합입니다.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진화론으로 창조를 부정하고, 거짓된 이념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죄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이념과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독일에서 성을 개인이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어떤 수술 없이, 일주일 간격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신고만 하면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독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 유럽 나라가 그 흐름으로 간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의 질서, 양성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있었던 동기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또다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죄의 힘을 빌려 하나님을 대항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창조주를 기억 속에서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확신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대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성취, 주어진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줄 것을 자꾸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바벨탑을 쌓고, 거대한 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탑과 의도적인 불순종 
둘째,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한 것은 창조주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계속해서 바벨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기업, 어느 도시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는지를 경쟁합니다. 그러나 위성사진으로 보면 모두 그게 그것입니다. 땅에 있는 인간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를 가지고 문명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기술력이자 능력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는 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한국에 있다고 해서 “나는 행복해”라고 합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감을 줄까요? 고층 건물에 올라가면 더 불안할 것입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 더 불안할 것입니다.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도가 달의 남극에 접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참 위대한 일이고, 성공적인 업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달에 오르고, 화성에 오르고, 목성에 오른다고  그곳에 하늘이 없을까요? 계속 올라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입니다. 하늘에 어떻게 닿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결의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하신 명령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흩어지기를 거부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의 약속을 통해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믿지 못했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지기보다 하나로 존재하고자 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평원으로 내려올 때도 같이 움직이고, 흩어지기보다 거대한 성을 쌓고 흩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인간들이 향하는 모습을 보고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 우리가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라고 했고,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쌓아 올리는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내려오셨다’는 표현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시기 때문에 내려오셔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려오셨다’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도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보셔야 할 만큼의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탑을 쌓아도 진정한 하늘로부터는 정말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제어하고 중단시키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바벨의 꿈을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을 흩어지게 하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한 민족으로서 모두 한 언어로 말하고 있어 이런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이 하고자 꾸미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하게 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그곳에서부터 온 땅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들은 성 쌓는 것을 그쳤습니다”(6~8절).
인류가 흩어진 결과로 언어가 혼란해진 게 아닙니다. 언어가 혼잡해진 결과로 인류가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바벨에 탑을 쌓는 그들의 꿈을 깨뜨리기 위해서 언어를 혼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점차 분열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위대한 성취나 도전도 하나님께 결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또 다른 심판을 하셨습니다. 죄로 결속된 하나 됨을 깨뜨렸습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발랄’입니다. 그 뜻은 ‘어지럽혀지다’, ‘뒤범벅이 되다’, ‘혼란스럽게 되다’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발랄’에서 앞에 ‘ㄹ’이 탈락하면서 ‘바벨’로 축약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혼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내용이 없을까 해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남승호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언어학에도 ‘단일언어 기원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나라의 언어를 추적하면 약 7천 개가 있는데, 모든 언어의 밑바탕이 되는 하나의 일반 원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어학에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가설입니다. 또 7천 개나 되는 언어를 사람들이 노력하면 학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혀 다른 언어인 것 같지만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하나의 언어였고, 그것이 흩어짐으로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언어는 하나였다는 보편 문법 가설도 주류 언어학에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일반 언어학에서도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언어마저 진화론을 갖다 붙여서 하나의 단어 혹은 발음이 진화해서 문법적인 체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발생부터 언어로 체계화되는 모든 것에 진화론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오랜 세월 동안 진화론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발전한 것입니다. 함경도에서 ‘ㄱ’이 나오고, 전라도에서 ‘ㄴ’이 나오고, 점차 발전해서 한글이 나온 게 아닙니다. 언어학에서도 진화론을 대입해서 진화로 언어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고, 인간들이 문법을 만들어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흩어지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 방법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들이 흩어짐으로써 온 인류가 7천 개 가까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종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며 언어를 혼잡케 하신 사건과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할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여러 나라와 민족 사람들, 바데 사람, 엘림 사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행 2:1~12). 
여러 가지 해설이 가능합니다. 실제 그들의 체계화된 언어를 외국어로 듣게 되었다는 측면이 있고,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원래 하나였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도 했습니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는 보편적인 문법 지식에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써 자기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것을 ‘방언’이라는 이름으로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역사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다시 성령의 역사로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벨탑에 내려진 심판을 회복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빠른 시일 내에 전파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흩어진 인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의 심판을 받아 바벨의 꿈은 깨어졌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은 죄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안티(Anti) 바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혼잡과 분열, 타락한 질서를 질서와 거룩한 하나 됨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바벨탑을 쌓듯이 끊임없이 이 땅에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의 성을 쌓고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끊임없는 바벨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스스로 성을 규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바벨의 꿈입니다. 바벨의 꿈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 성령의 능력으로만 깨뜨려집니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로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인이 된다는데 무슨 말인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한다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말합니다.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가 전 세계에서 제2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흩으시는 하나님 심판의 일종이었습니다. 죄의 힘으로 함께 모여 있던 인간들을 하나님이 거리두게 하셨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시대 바벨의 꿈을 저지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징계였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시 바벨의 꿈을 이어가는 인간의 꿈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바벨탑을 만들어가는 인류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바벨의 꿈과 하나님 나라의 꿈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기회를 주셔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벨의 꿈이 아닌 성령의 꿈을 좇아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