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은 성경 역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장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두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성경 지면의 분량으로도 이 두 사람의 생애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등장과 함께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전 인류의 역사에서 그 폭이 좁아집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전 인류의 역사, <창세기> 12장부터 <사도행전> 2장까지는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중심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후손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다시 전 인류의 역사로 바뀝니다.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하거나 유대중심주의, 유대특수주의라는 시각으로 세상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마치 본연의 인류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부속적인 존재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 인류,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나머지 세상 민족들은 불필요하거나 부속적인 것으로 여긴 게 아닙니다. 유대 민족만 본연의 인류거나 새로운 인류로 간주하신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등장과 함께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전 인류의 역사에서 그 폭이 좁아집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전 인류의 역사, <창세기> 12장부터 <사도행전> 2장까지는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중심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후손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다시 전 인류의 역사로 바뀝니다.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하거나 유대중심주의, 유대특수주의라는 시각으로 세상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마치 본연의 인류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부속적인 존재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 인류,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나머지 세상 민족들은 불필요하거나 부속적인 것으로 여긴 게 아닙니다. 유대 민족만 본연의 인류거나 새로운 인류로 간주하신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역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전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그 이후 족보가 나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데라를 택하시고, 데라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벨에 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 인류를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인간의 죄는 무서운 심판으로도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심판이라는 무서운 형벌이 임했으면 사람들이 죄로부터 떠나야하는데, 심판을 받아도 인간의 죄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홍수 심판 이후 역사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흩으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합니다. 셈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친밀한 교제를 하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 데라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으심으로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신다는 노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케 하신다는 말씀은 이미 노아에게 주신 말씀, 셈의 장막을 창대하게 하셔서 함과 야벳, 모든 족속이 셈의 장막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그 예언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류를 심판하셔서 세상에 흩으셨지만,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벨에서 인간의 타락과 정반대로 하나님은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부르심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이 바벨에서 탑을 쌓아 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자신들의 능력으로 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그들의 이름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전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그 이후 족보가 나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데라를 택하시고, 데라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벨에 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 인류를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인간의 죄는 무서운 심판으로도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심판이라는 무서운 형벌이 임했으면 사람들이 죄로부터 떠나야하는데, 심판을 받아도 인간의 죄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홍수 심판 이후 역사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지만, 흩으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합니다. 셈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친밀한 교제를 하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 데라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으심으로 셈의 장막을 넓게 하신다는 노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케 하신다는 말씀은 이미 노아에게 주신 말씀, 셈의 장막을 창대하게 하셔서 함과 야벳, 모든 족속이 셈의 장막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그 예언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인류를 심판하셔서 세상에 흩으셨지만,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벨에서 인간의 타락과 정반대로 하나님은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부르심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이 바벨에서 탑을 쌓아 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자신들의 능력으로 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그들의 이름이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인가?’라는 이유를 그 이전에 나오는 족보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27절 이하를 보면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가정환경, 형편, 배경에서 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나오는 “너를 창대하게 하고, 너를 복 되게 하여 너의 이름을 높임으로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일단 아브라함의 가정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르에서 주로 달을 신으로 섬기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계기로 만났을까요? 그 힌트가 형제 하란의 죽음입니다. 부정적 사건 이면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함께 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원하지 않는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을 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일어난 일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야 할 하란이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계기가 되었던 게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신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은 거라는 왜곡된 인식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은 그들이 믿는 달의 신, 그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섬겼던 신으로부터 어떤 저주를 받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부터 시작해서 이방신을 섬기는 가정이었고, 자녀를 낳지 못하는 가정이었습니다. 형제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겪은 가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왜 아브라함인가?’라는 부르심에 대한 배경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입니다. 많은 자손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면 노아와 셈과 셈의 후손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인물을 뽑으라면 욥이 될 것입니다. 욥의 시대가 <창세기>입니다.
욥은 경건한 노아의 후손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었습니다. 자녀도 많이 낳는 가정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경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 주시고, 구원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 택하는 조건에서 욥보다 좋은 조건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뽑으라면 욥이 뽑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따른 것은 전능하신 분의 힘이 그와 함께 역사했었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그의 마음을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의 선택보다 큽니다. 나의 능력보다 큽니다. 부르심이란 내가 하고 싶은가, 싫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어떤 제약 가운데서도 이루어집니다. 부르심이 아니라면 모든 풍족한 환경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된다면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포기되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갑니다. 어떠한 제약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해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1~3).
이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어떻게 전 인류를 구원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이후 모든 성경 역사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항상 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까지 이 말씀에 비춰서 역사를 해석할 때 하나님이 이 말씀 그대로 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1~3).
이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어떻게 전 인류를 구원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이후 모든 성경 역사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항상 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까지 이 말씀에 비춰서 역사를 해석할 때 하나님이 이 말씀 그대로 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류의 조상처럼 대하십니다.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을 주셨고 복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이 약속됩니다. 아담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3절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복’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반복됩니다. 타락 이후에는 11장까지 ‘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판’, ‘하나님의 저주’, ‘형벌’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등장합니다. 인간의 타락인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저주’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나오는 저주라는 단어를 12장 이 짧은 구절에 다섯 번 등장하는 ‘복’이라는 단어로 씻어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어느 학자가 개인적으로 번역할 것을 구조적으로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합니다. 한글 성경 순서가 아니라 거의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구조가 이렇게 보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나가라. 너의 본토로부터 너의 친적으로부터 너의 아비 집으로부터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도록 그래서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도록 그리고 축복이 되게 하도록 그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도록)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에 아브람이 갔고 롯도 갔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이 갔습니다. 그 안에 ‘무엇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본토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점점 더 가까운 순으로 옵니다. 본토라는 넓은 나라의 영역, 그리고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정은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가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이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나가라. 너의 본토로부터 너의 친적으로부터 너의 아비 집으로부터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도록 그래서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도록 그리고 축복이 되게 하도록 그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도록)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에 아브람이 갔고 롯도 갔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이 갔습니다. 그 안에 ‘무엇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본토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점점 더 가까운 순으로 옵니다. 본토라는 넓은 나라의 영역, 그리고 친척으로부터, 아비 집으로부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정은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가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이 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두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크고 강대한 민족으로 복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먼저 복을 받는 수요자가 되어서 크고 강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이제는 복의 전달자가 되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을 정도로 타락한, 홍수 심판으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하나님이 노아의 후손 가운데 셈의 후손, 셈의 후손 가운데 데라, 데라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케 복을 주셨습니다. 역사가 그들이 창대케 되는 것을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해서 부르신 사람들을 창대케 하고 복을 주심으로써 너희에게도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먼저 부르신 자가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아브라함과 후손 편에 서서 싸우시고, 축복하시고, 창대케 하는 걸 보고 일반 역사가들이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생활 법칙을 연구해서 유대인처럼 사는 법을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탁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탁월했기 때문에 번성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유대 민족이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완악함을 배웁니다.
복의 통로가 되는 목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
두 번째로 반복되는 단어가 ‘내가’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1인칭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을 고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원문을 보면 ‘내가’를 강조합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으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훌륭하기 때문에 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목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
두 번째로 반복되는 단어가 ‘내가’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1인칭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을 고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원문을 보면 ‘내가’를 강조합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으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훌륭하기 때문에 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목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신비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렸던 이들이 나라를 되찾고, 짧은 기간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 구약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역사가 근현대에도 일어났습니다. 완강히 그들을 압박하는 틈바구니 속에서도 생존했고, 다른 민족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택하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 때문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정반대로 그 목적에 합당하지 않게 복을 받았음에도 전달자가 되지 않으면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심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잊어버리고,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만 해도 받아들일 텐데 성경을 읽지 않고 율법을 해석한 탈무드와 미드라시, 또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만들고 성경에서 떠났습니다. 그들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고, 그들이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망각하는 것을 돌이켜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많아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잊어버리고,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만 해도 받아들일 텐데 성경을 읽지 않고 율법을 해석한 탈무드와 미드라시, 또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만들고 성경에서 떠났습니다. 그들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고, 그들이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망각하는 것을 돌이켜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많아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내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좋은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하지만, 동쪽으로는 바벨론, 페르시아가 있고, 남쪽으로는 이집트가 있고, 서북쪽으로는 그리스, 서쪽으로는 로마 등이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작은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끼어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땅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순종하는 자에게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모든 역사의 청사진을 보여 주시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해지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부르심과 함께 여행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부르심이 임하고, 그 부르심과 함께 여행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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