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십시오 (롬 12:9~21)

새벽지기1 2023. 1. 6. 07:19
로마서 12장은 성경학자들이 로마서에서 가장 비논리적이고 산만하다고 지적합니다. 일정한 주제가 없고, 여러 구절이 연결점 없이 나열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고 있기에 논리가 필요 없습니다. 논리를 초월하는 표현들이 나타날 뿐입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이고, 동시에 진정한 관계와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로마서 마지막 16장에서는 바울이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며 감사하고 문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는 것과 대조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설명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큰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이름처럼 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내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면 크고 놀라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할 때 한 가지 주제와 논리 속에 담기 어렵습니다. 때로 논리적 연결성이 결여되는데 학자들이 그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을 주석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구절 한 구절 연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삶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들이라면 삶과 공동체의 관계에서 올바른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전체를 한 가지 주제로 통일성 있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구절을 꼽으라면 15절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15절).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동체. 누군가의 아픔이 진정 나의 아픔이 되고, 누군가의 기쁨이 진정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관계, 혈연이 아니더라도 영적인 혈연으로써 누군가의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다가오고,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다가오는 관계가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
첫째, 거짓이 없는 사랑이 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십시오”(9절).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 사랑은 위선적이지 않고, 악한 것을 혐오하고,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위선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위선이란 자기를 나아보이는 존재로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위선이 포함된 거짓이 필요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예루살렘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죽는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실제 자기보다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헌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의논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이 있고, 훌륭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짓이 틈을 탔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긴 팔았는데 일부를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거짓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예루살렘교회에 거룩한 영으로 임하셨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실려 나가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예루살렘교회를 거룩하게 다루셨던 이유는 거짓이 조금도 틈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잡는 공동체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잡는 진리에 기초한 공동체를 만들면서 사랑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서로 사랑을 추구하면서 진실을 버리기 쉽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공동체의 모습을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모습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사랑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선한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정결한 사랑, 거짓이 없는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지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먼저 존경하며”(10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에 힘쓰십시오(13절). 
“여러분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14절).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성도들과 나그네에 대한 사랑, 심지어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자신에서 형제로, 형제에서 성도들로, 성도들에서 나그네로, 나그네에서 핍박하는 자로 사랑의 대상이 점점 확대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은 결코 그 자체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점점 확대됩니다. 거짓이 숨어 있는 사랑, 가식과 위선이 있는 사랑은 절대로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가면을 쓰는 사랑, 위선과 가식, 거짓이 포함된 사랑은 점점 축소되고, 결국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사랑할 때 거짓 없는 사랑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
둘째,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이 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열심을 내 일하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를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기뻐하고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십시오”(11~12절). 
열심을 내되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이어야 합니다. 열심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열심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 그 자체가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열심 그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방향과 목적, 동기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떤 동기로,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의 위선을 위해서 열심을 낼 수도 있고, 나의 거짓을 위해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뜨거워진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심이 관계를 어렵게 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은 결국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공로의식과 보상의식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돌아올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유가 되어 열심을 내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판가름 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서 그 사람이 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열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하고,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이 해야 하고, 다른 기준으로 그 일을 하니까 결국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처음 파송 받은 바나바가 다소에서 바울을 데려다가 그 사역을 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바나바는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인 바울을 세웠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세움으로 안디옥교회가 사도행전의 역사를 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먼저 보냄을 받은 것은 바나바이기 때문에 혼자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보냄을 받아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하고 이끌어가는 리더로 바나바의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가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안디옥교회는 사도행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바울을 세움으로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으로 두 사람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은 상처를 쉽게 받습니다. 쉽게 지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을 가진 사람은 인내심이 큽니다. 때로 상처받을 일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심각하게 결여되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할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
 
셋째,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이 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며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마십시오”(16절). 
로마 교회에 있었던 갈등과 불화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 이방인들 중에 예수 믿은 사람들은 많은 수가 노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분제가 있었던 당시에 노예가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사회처럼 똑같이 무시하고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라는 것입니다. 여기 ‘비천한 사람들’은 당시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당시는 신분제도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한지 도전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복음이 들어와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로마 교회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우리는 복음 안에서 똑같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생각하는 게 어색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정말 귀한 간증들이 나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말을 끄는 마부가 주인과 함께 교회에 출석을 했는데, 그 마부가 신실하게 섬기면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인은 그 지역 유지였습니다. 장로 투표를 하는데 마부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 기쁘게 마부를 장로로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웁니다. 나중에 마부를 신학공부를 시키고, 그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탈피할 수 없었던 노비제도를 가장 먼저 탈피하고 변화시킨 공동체가 한국 교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놀랐습니다. 한국 사회가 노비제에서 탈피할 수 있는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구습을 탈피하고, 조혼을 철폐하고,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일으키는데 한국 교회가 앞장섰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때로 상처를 받는데 그 상처가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C.S.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지 누구든지 사랑하면 때로 마음을 졸이게 되고 마음이 찢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그냥 상자에 가두듯이 자신의 마음이 누구와도 연결이 되지 않도록 하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찢어지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받지 않겠지만, 찢어질 수 없게 된다.”우리가 누군가와 교제하면서, 공동체와 순에서 때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찢어지지는 않겠지만, 찢어질 수 없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 외에 당신이 사랑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지옥뿐’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로 나아가면서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으로 낮아질 때 때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단어(humility)와 치욕(humiliation)의 라틴어 어원이 같습니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겸손으로 갈 수도, 치욕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으로 진정한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때 
넷째, 선으로 악을 이길 때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여러분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14절).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힘써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기록되기를 ‘원수를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아 주겠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굶주려 있으면 먹이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어라. 이로써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17~21절). 
17절에서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힘써 행하십시오”라고 했고, 21절에서는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겸손과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으로 섬기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이었기에 이 시대에도 선으로 악을 이기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3~45).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옮겨놓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감정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좋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을 행할 때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싫어하면서 쉽게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쉽게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도와줬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좋아해서 도와줬겠습니까?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왜 도와줍니까? 좋아서가 아니라 강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합니다. 원수가 좋아져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평생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그 원수에 대한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이 느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기 전에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이 싹트고 꽃이 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2장에서 “원수가 굶주리고 또 목말라하면 먹이고 마시게 하라. 그러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숯불’이라는 원어적으로 동일한 단어가 신약에 세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원수 같은 존재를 위해서 식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머리에 숯불이 올려진 것과 같다는 잠언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잠언에 한 번 나오고, 요한복음에 나오고, 로마서에서 잠언을 인용한 말씀으로 나옵니다. 45절 후반부에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밭에만 비를 내려 주고 햇빛을 주시고, 예수님 안 믿으면 어둠만 있고, 비도 안 오고, 사업이 계속 망하면 1년 내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전도하지 않으십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도 햇빛과 단비를 동일하게 내려 주시는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악을 용납하시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심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멀리했지만, 그분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동일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마지막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아들들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에 올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랍어 표현에 형용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명사와 명사를 가지고 최상급의 형용사를 쓴 것입니다. 악한 이들, 하나님을 배반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희생하심으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아버지이시기에 그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녀가 되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들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자들이 이루는 관계이자 공동체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까지 나아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성도이자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