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나님의 부요한 지혜 (로마서 11:25~36)

새벽지기1 2022. 12. 23. 05:56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과 부요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구원계획에는 하나님 구원의 스케줄이 나타납니다. 역사의 B.C.와 A.D.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중요한 통로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이심을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구원의 스케줄을 ‘비밀’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비밀’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감춰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 사람에게만 알려지는 비밀도 아닙니다. 한때는 모든 사람에게 감춰졌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밝히 드러나 알려져야 하는 공적인 진리를 가리킵니다. 구원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고, 역사 속에서 전해졌습니다. 로마서 9~11장에서는 이스라엘 불신앙 문제를 안타까워하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소원을 아뢰는 바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나타남을 설명합니다. 로마서 11장 전반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불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생길 수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파괴된 것인가?”,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주신 약속이 없어진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도 “그렇지 않다”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루시고, 계획을 이뤄가시는데 왜 이스라엘은 완악함과 불순종 가운데 대다수가 처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과 로마서 11장 전반부에 나타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납니다.
지난주 첫 번째 축복의 사슬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확산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완악함으로 인하여 원가지가 부러지고, 부러진 곳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산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성령이 임했고 흩어진 이들이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에 사로잡혀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태어난 교회를 통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더욱 확산할 수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율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마땅한데, 예루살렘교회 유대인들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초기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였던 그들조차 율법에 사로잡혀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데 장애물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교회가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해지는데 중요한 선교센터 역할을 합니다. 만일 예루살렘교회가 장애물 없이 계속 확장되었다면 어쩌면 복음이 더 널리 확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화 하지 않은 완악함이 도리어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는 역설적인 흐름이 사도행전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이 접붙임이 되어 복음이 더욱 이방인에게 확산되는 첫 번째 단계의 축복이 초대교회 이후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대인에게 시기심이 일으켜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산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선한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나쁜 시기심’은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것이지만, 마땅히 나에게 속한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선한 시기심’입니다. 마땅히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악의 영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성령님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시기하심과 같이 구원에 대한 열망과 거룩한 시기심이 일어납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심이 일어나 구원받는 유대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당시에 볼 때는 미래이고 우리가 볼 때는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입니다.
우리에게도 미래가 되는 역사를 바울이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3단계 축복의 사슬’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다시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확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이방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다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축복의 사슬이 이어지는 것을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서 예언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한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앙 원인은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완악함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만 역사 속에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목적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구원으로,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이방인의 부요한 구원으로 흘러가며 복음이 온 세상에 확산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이란 
‘인종적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수’
“…이 비밀은 이방 사람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가 완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25~26절). 
‘이방 사람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이 바울 당시처럼 대다수가 믿지 않는 상태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26절 초반부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장차 미래 이스라엘의 다수가 구원을 얻을 것을 바울이 확신하고 있다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23절부터 흐름을 보면 처음에는 가능성 정도로 설명하는데 점점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또한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23절).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24절은 개연성으로 확대됩니다.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24절). 26절에서는 확실성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26절).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접붙일 수 있고, 더 쉽게 접붙이시며, 이것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온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전체가 아닙니다. ‘온’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온’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잘못이고, ‘온’이라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9~11장에서 계속 사도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다루었습니다. 24절에서도 “원 가지가 더 쉽게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26절에서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종적 이스라엘의 문제를 계속 다루다가 갑자기 26절에서 교회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문맥의 흐름과 그 이후 말씀을 살펴봐도 “온 이스라엘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논리적 비약이 심합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울 당시에 많은 유대인이 불신앙 가운데 있었지만 모두 불신앙 가운데 있지 않았듯이,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전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체는 아니지만 지금 보다 훨씬 많은 수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시기심을 일으키게 되고, 유대인의 충만한 구원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더 부유한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만 구원받는다는 문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먼저 택함을 받은 바울의 동족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 걸 가지고 구원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란 ‘인종적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수’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그래야 로마서 9~11장 전체 문맥에 일관된 흐름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들이 한때 불순종과 완악함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라 심판받기에 합당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서 불순종하는 이들을 심판에 처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자유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고 무능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심판과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임에도, 하나님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진멸함으로 끝내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 심판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노아와 그 후손들을 남겨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처럼 되려했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완악함을 또 나타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은 심판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무서운 심판과 형벌로도 인간의 완악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사람은 지옥에 가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끝까지 완악함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죄 가운데 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사람의 완악함입니다. 하나님의 불의함이 아니라 인간의 불의함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누군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전적인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긍휼하심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애 버릴 때 이루어질 것이다’”(26~27절). 
하나님이 맺으신 죄 사함의 약속이 택하신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약속이 그들에게도 긍휼과 은혜가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번복될 수 없습니다”(29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다스리고,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온 세상사람’의 구원에 대한 중요한 본보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완악함 가운데 처했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모든 사람이 불순종과 완악함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대하듯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 불순종과 완악함이 있지만, 하나님이 긍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32절).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사람은 불순종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로 대하십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두신 것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불순종이 없다면 긍휼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불순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긍휼을 받기 위해 불순종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순종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긍휼을 끝까지 거부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mercy)과 은혜(grace)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마땅히 치러야 될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심판과 형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와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는데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고, 은혜는 받을 수 없는 것을 받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긍휼이 먼저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긍휼을 받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없어지고, 은혜의 대상 자체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많은 고백에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상태가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불의함과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값없이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긍휼로 대하시고,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은혜로 용서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죄에 정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은혜에 정복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불순종이 긍휼하심을 입고, 우리의 죄악이 은혜로 씻어졌기 때문입니다. 동족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고,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 송영을 드리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는가? 누가 주의 조언자가 됐는가? 누가 주께 먼저 드려 주의 보상을 받겠는가?’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해 있고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33~36절).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만물을 붙드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만물을 심판하십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이루십니다. 그분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상을 할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드려야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고, 돈도 필요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해 존재하고,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이 주인이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 나의 삶도 붙드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분이 존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고, 왜 만물을 통치하시고, 만물을 심판하십니까? 그분께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절대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이 시대 우리가 겪는 수많은 질병, 인간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통치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그들을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자이고, 통치자이시고, 주관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달려온 이 모든 진리의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찬양입니다. 1~8장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설명했고, 9~11장은 이스라엘 불신앙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온 세상에 어떻게 퍼져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 하나님의 부요한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12장이 시작됩니다. 12장은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삶의 모든 모습에 적용을 시작합니다. 로마서 11장과 12장 중간에 하나님께 대한 송영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진리와 지식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이유도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만물의 통치자이시고, 영광 받으실 그 분께 영광을 올려 드려보십시오. 삶의 문제를 먼저 보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목적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를 바라볼 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십시오. 그때 모든 것이 해석될 것입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해 존재하며, 그분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 드리는 삶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