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롬 11:1~24)

새벽지기1 2022. 12. 5. 07:22
로마서 9~11장에는 비극적인 역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권을 누리는 이스라엘이 도리어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버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었는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대로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을 따라 이루어졌기에 아무 잘못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전부를 구원하시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 처하게 내버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은 구원받아 마땅한 이들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심판받아 마땅한 이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서 택함 받은 이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이들에게 구원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긍휼하심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한 이들을 통해서 또 다른 이들에게 구원이 전파되도록 하신 이유는 인간의 타락한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이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마음이 완악한 이들에게는 정말 어렵습니다.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것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완악함이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인간에게는 손 내밀고 계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우리의 손입니다. 
바울과 엘리야 이야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1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들이 구하고 찾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가미가 되었다”는 시편 69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밥상이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밥상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덫과 올가미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축복의 통로가 된 민족이 정작 자신들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심령이 혼미해지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밥상이 도리어 덫과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밥상을 주시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밥상이 덫과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실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 가지 예를 들어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첫째,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예로 듭니다. 바울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까닭은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한 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과 삶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것을 볼 때, 아직도 완고하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러주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손 내밀고 계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적 예도 듭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제사장들과 상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승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이세벨은 회개는커녕 엘리야를 죽이려고 위협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위협이 두려워서 도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여주시고 재워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지만, 엘리야는 호렙산 굴까지 숨게 됩니다. 18장에서 갈멜산에서 승리를 경험한 엘리야가 19장에 호렙산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찾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기에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고 합니다.” 상황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합니다. “기름 부어 왕들을 세우고, 너를 대신해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너의 직무를 대신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내가 남겨두었다.” 이 전체적인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냉정한 말씀입니다.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죽기를 자청했고, 호렙산 굴에 숨어서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이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워라. 그리고 7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신 말씀은 “네가 아니라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다”는 오해와 착각입니다. 이미 7천 명이 남아 있고, 엘리야를 대신해서 일할 엘리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엘리야는 자신이 너무 중요하게 보였습니다. 갈멜산의 승리는 어쩌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영적 체험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들게 되는 시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너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위대한 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셔서 사용하셨을 뿐인데 자신이 너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면 상황이 어려워졌을지라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자기 의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위대해서 능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절망할 필요 없고, 오직 자신만 남았다는 착각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 쓰임 받았을 뿐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은혜로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쓰임을 받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너무 중요해지면 ‘나 없으면 이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지? 염려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네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에 빠지면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자기 의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는 말은 맞는 것 같지만 오해이자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도 있고, 7천 명이 있다”는 말씀으로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올바른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도와주고 있고,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홀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들어 사용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뿐입니다. 은혜로 택함 받았다는 은혜 의식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자기의식, 자기교만, 자기자랑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있었던 잘못된 의식과 믿지 않는 이들이 많으니 하나님이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들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이 민족을 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때로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과 일부 교회들의 문제와 잘못된 모습을 보고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다고 단정하고 정죄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마저도 모든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 안 나간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자기 문제요, 자기 의입니다. 사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소천하신 이어령 고문님이 온누리교회에서 하용조 목사님께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문제 많은 교회에 왜 나가느냐?”고 했더니 한 마디 하셨답니다. “당신은 어느 식당에서 식중독 걸리면 식당은 앞으로 안 갑니까?” 아주 쉽고 단순한 이야기로 응수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완고하게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람도 변화시킵니다. 또 엘리야처럼 자기 의에 빠져 오직 자신만 남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7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불신앙,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쓰러져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1절). 
11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불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한 넘어짐은 끝이 아니라 일시적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로 인해서 더욱 놀랍고 크신 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실패는 목적이 있는 실패요, 하나님이 온 세상에 전하시는 축복의 사슬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이 전해지는데, 이스라엘의 부러짐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감람나무’라고 했는데, 올리브나무입니다. 참올리브나무, 돌올리브나무입니다. ‘돌’이라는 것은 참이 아니라는 면에서 번역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치가 없고, 상품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구원과 선택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택함을 받은 이들을 참올리브나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과 구원과 놀라운 섭리가 함께하는 이스라엘, 참올리브나무 가지들이 꺾임으로 부러졌습니다.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지가 꺾인 부분에 돌올리브나무들을 접붙임을 함으로써 참올리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섭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러짐과 넘어짐을 통해서, 부러진 곳에 접붙임을 통해서 가지가 더욱 확장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어떤 식물학자들은 “이거 틀렸어. 접붙임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과학을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식물에 접붙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지가 부러지고 그것을 원가지의 접붙임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 구원의 축복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구원이 오는데, 시기심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1절). 
“이는 내가 어떻게든 내 동족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4절). 
‘시기심’은 부정적인 단어인데 왜 이런데 썼을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시기심을 일으켜 구원받게 한다는 표현이 비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기심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것이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시기와 질투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나에게 속한 것이고, 나에게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 속하지 않을 때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선한 것입니다. 나에게 속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선물이 나에게 속한, 내가 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을 시기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이스라엘에 있는 ‘메시아닉 쥬’들 가운데도 이러한 시기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고 사는 사람들인데도 이 호수를 실제로 거니셨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데, 저들은 갈릴리 호수를 걸으며 눈물 흘리며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산에 올라가겠다고 하고, 골고다 언덕에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서, 우리 뒷산이 예루살렘인데, 저들이 왜 저러는 것일까? 전 세계에서 성지순례로 모여드는 이들을 보고 궁금해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축복이 있었는데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축복의 사슬은 이스라엘에게서 다시 이방인에게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충만함으로 인해서 더 큰 부요함이 온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큰 부요함을 가져오겠습니까?”(12절).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부러진 부분에 접붙임으로 이방인들에게 큰 축복이 전해졌다면 이제 이스라엘의 충만함은 더 큰 부유함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더 큰 충만함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본래 돌올리브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하물며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23~24절).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 그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믿는 유대인들이 많아지고 있고, 또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로 이스라엘에 시기심이 일어나고 있고, 충만한 구원이 이루어질 때 전 세계에 부유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전 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 많이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에게서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더 큰 부요함이 온 세상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나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머무르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 역시 잘려 나갈 것입니다”(22절). 
바울은 유대인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 이방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해 줌으로써 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인자하시며 또한 준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상태에 머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버려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무른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마땅한 이들,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자비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선택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물고 있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누군가 하나님의 준엄하심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인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의 목적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 심판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앞에 믿음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누구든지 뒤로 물러서면 내 영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히 10:38~39). 
오직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기억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를 날마다 누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거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