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영적 예배 (로마서 12:1~8)

새벽지기1 2023. 1. 1. 07:45
오늘 본문은 로마서 전체에 중요한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에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모든 교훈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 복음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내용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 문제를 동족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 어떻게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 되는지와 인간의 불순종을 뛰어넘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역사를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복음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에 대한 교훈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다시 듣는 것 같습니다. 실제 비슷한 구절들을 점검해보면 직간접적으로 15구절 정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천국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윤리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1절). 
복음은 “삶을 스스로 변화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가 가능하게 된 근거가 복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 삶이 변화가 가능해졌고, 그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비’라는 단어를 썼는데. 원문에는 복수로 쓰였습니다. ‘풍성한 자비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하심에 나타난 부요와 지혜와 지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불순종의 대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자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자비하심이 우리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 선택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영적 예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절에서는 ‘영적 예배’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살아있는 제물,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역설’이란 서로 맞지 않는 상반되는 주장이 하나 되어 진리를 설명할 때를 말합니다. 첫 번째 역설은 ‘산제물’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물은 죽어야 합니다. 비둘기, 송아지 등 어떤 제물이든지 죽어야 하고, 피를 흘려야 하고, 태워져야 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하고, 모두 죽어야 제물이 됩니다. 그런데 ‘산제물’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온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죽음을 죽지 않고,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고 하나님이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이 임해서 살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은 자로써는 ‘제물’이란 뜻이고, 부활의 생명으로 산다고 할 때는 ‘살아있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예배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제사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역설은 “몸으로 살아있는 제물로 드려지는데 그것이 곧 영적 예배”입니다. ‘몸으로 드리는데 이것이 영적인 것’이 역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리 큰 충격이 아닌데, 당시 헬라인들이게 ‘몸(사륵스)’이라는 단어는 ‘육체 덩어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하하는 단어입니다. 몸이라는 단어를 당시 사람들은 악하게 보았고, 또 정죄된 언어로 보았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플라톤 철학, 이원론 철학에 깊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몸은 악하고 더러운 것이며, 영과 정신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구원을 몸으로부터 정신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 몸으로 드려지는데 그것이 영적이라는 것은 충격입니다. 당시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몸은 무덤이다”(soma sema estin)입니다. 소마가 몸이고, 세마가 무덤입니다. 비슷한 단어를 사용해서 “우리 육체는 곧 무덤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충격적인 역설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것도 역설이고,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역설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옛사람을 처리하였고, 죽음으로 이끌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에 살아 있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예배로 드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드리는 공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시간, 순간, 행위 등 살아있는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 행위가 되었습니다. 예배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이 곧 예배이고, 예배가 곧 삶이 되는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졌고, 앞으로 주어지는 모든 삶에 대한 교훈의 핵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부활의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삽니까?”라고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몸으로 드리는 모든 것이 거룩한 산 제물이요, 영적 예배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죄는 행함으로 나타나기에 행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거룩함을 이뤄갈 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을 따라 우리 몸의 모든 삶의 행위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선택, 말과 행동이 과연 예배로 드려지는가가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2절). 
1절과 2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라고 연결되어 있는데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일 것을 권고하고 있고, 2절은 정반대로 수동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제물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성령님이 임하셔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은 이 세대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 세대의 세계관, 가치관, 문화관, 인생관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천국의 관점, 영혼의 관점,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게 되는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외적 행위의 변화 이전에 마음과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고체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됨을 입는 것입니다. 세계관과 관점과 생각과 가치기준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변화는 피상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이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변화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명령형이지만 수동형입니다.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절 영적 예배를 드린다는 건 능동으로 설명했는데, 왜 2절은 수동으로 설명했을까요? 변화는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도로 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역사로 영적 예배를 드릴 때 어느 순간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나오기 전에 ‘내가 무엇을 해야지. 내가 이래야겠다’고 결정했는데 예배드린 후에 ‘다르게 해야겠다’고 결정을 바꾼 경험이 있습니까? QT 전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QT를 마치고 나서 결정이 바뀐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배드리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화를 받는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주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변화, 이 세상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변화가 아닙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이 우리를 어떤 틀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새롭게 된 마음에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동 명령체를 썼습니다.  
2절 후반부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능동태인 것 같지만 부정사를 썼습니다. NIV 번역이 이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2절b).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별하라”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분별’은 열매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해서, 변화를 받아서 예배를 드리자”고 생각하기 쉬운데, 정반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 예배자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변화 받는 것이고, 마지막이 분별 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다시 정리하면 예배드림이 먼저고, 그로 인해 변화를 받고, 그로 인하여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이 안 된다면 그 전에 마음의 변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분별이 안 됩니다. 왜 마음의 변화가 되지 않습니까? 예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예배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예배드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산 제물로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자가 될 때 변화 받아지고, 그 다음에 분별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어떤 윤리 기준에 따라서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영적 예배자로서의 삶과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변화된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3절에서 8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 우리가 함께 영적 예배공동체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삶의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도 있지만, 공동체로서 몸 된 지체로서,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자로서 함께 예배공동체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섬김과 나눔을 하나님이 영적 예배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 13:15~16). 
앞부분에 ‘찬양의 제사’가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찬양의 제사가 있고, 뒷부분에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영적 예배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예배와 수평적인 예배입니다. 예물을 드리러 갈 때 누군가와 다툼이 있어서 기억이 나거든 먼저 화해하고, 관계를 화해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이 세상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과 나눔을 행하는 것이 예배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직적 예배공동체의 모습이 있고, 수평적 예배 공동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수직직 예배공동체의 모습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고, 수평적 예배는 섬김과 나눔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섬김과 나눔을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각양각색의 은사를 나눠주셨습니다.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지도, 긍휼을 베푸는 일 등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함께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영적 태도를 하나 말씀했는데,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입니다. ‘믿음의 분량’이라는 것을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량이라는 단어 자체가 양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헬라어 ‘메트론’은 양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메트론’이 ‘미터(m)’의 어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기준대로’라고 번역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믿음의 분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믿음이 크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작다는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단 한 가지 기준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량, 능력, 성취, 노력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평가하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공동체로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로 받아들이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보다 높게 평가하거나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준으로만 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은사를 더 해 주십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섬길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이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에 빠지면 그 공동체가 깨어지고, 세상 속에 참된 예배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말보다 어떤 공동체를 이루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지체가 기능이 뛰어나게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그 지체만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함께, 그 많은 은사들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십니다. 또 어느 지체가 눈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세상을 섬기는 예배공동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은 다른 이들의 다양한 은사를 존중하고, 함께 섬기는 예배공동체입니다. 바울이 바나바를 통해서 세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바울의 은사를 보면 분명히 그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그 은사는 없었을지라도 권면하고 예언하고 구제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은사가 하나 됨을 통해서 안디옥교회에 섬김의 역사가 나타났고, 복음 증거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졌습니다. 의견 차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나 되어 섬겼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이 마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바나바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영적 예배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순에서 만나든, 사역팀에서 만나든, 어떤 관계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서 서로를 세워가고, 세상 속에서 섬김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예배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합니다. 함께 세상 속에서 선행과 나눔을 베푸는 것을 소홀하지 않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