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삼하 19:1-15)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것은 공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공과 사의 구별이 사라진 곳에는 혼돈만 있습니다.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유다군인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왕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너무나 슬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의 개선가는 커녕 조용히 지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요압은 담대하게 왕에게 나가서 왕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며 우리가 다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사실 이 슬픔은 요압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얼마든지 생포할 수 있었지만 요압의 정치적 판단으로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왕께서 일어나 나가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고 협박을 합니다. 요압의 직언에 다윗은 아무 댓구없이 정신을 차리고 성문에 앉읍니다. 성문은 재판의 장소이며, 모든 백성을 대면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다윗에게로 나옵니다.
그런 후에 다윗의 환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장막으로 도망갔던 이스라엘 사람들 즉 10지파의 지도자들이 왕의 예루살렘 환궁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한 왕의 귀환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즉 환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즉시로 환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생각에는 북 이스라엘 지파와 유다지파의 모든 지파가 하나가 되어 자신의 환궁을 맞이하기를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유다지파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왕의 환궁에 대하여 설득을 합니다. 유다가 다른 지파와 달리 머뭇거렸던 것은 이들이 압살롬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향하여 내 가족임을 강조합니다.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12절)"
이렇게 안심시킨 후에 그 증거로 압살롬의 군대장관인 아마사를 향하여 내 골육이며 내 옆에서 항상 지휘관의 역할을 하게 할 것임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합니다. 다윗이 아마사를 총 군대장관으로 세우는 것에는 적어도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지파에게 안심을 주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강력해진 요압을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설득에 유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14절). 그리고 다윗은 한 마음이 된 것을 보고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릅니다.
다윗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비의 사적인 모습과 요압의 직언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위로하는 공적인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무리한 환궁을 하지 않고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만든 지혜를 봅니다.
다윗은 심령이 따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던 압살롬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쳐서 공적인 문제를 혼돈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행하십니다.
다윗은 요압의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망각하지 않은 좋은 지도자였습니다. 요압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다시 차립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분열이 솔로몬 이후에 다가오지만, 다윗의 마음은 나라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귀환식을 길갈에서 갖습니다. 이스라앨 역사에서 길길은 할례를 시행하여 애굽의 수치를 내어버린 곳입니다. 다윗은 길갈에서 다시 나라의 통치를 시작합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공의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는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예수 믿음은 바로 완전한 사랑을 받는 사랑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계략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묻고 따르는 일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면 분열의 씨앗을 심게 됩니다.
평화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사랑과 평화를 만들어 냅니다. 다윗을 통하여 다시금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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