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삼하 3:27-39)
피 흘림없는 평화, 언약 가운데 이뤄질 통일이 눈 앞에 왔지만 한 순간에 무너짐을 경험합니다. 아브넬의 생각이 의도치 않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불러서 그를 죽입니다. 약속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복수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용서라는 용기를 내어야 하는데 복수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평화통일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국 누군가의 피 흘림이 있은 후에 통일을 이룹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브넬을 죽인 자인 요압 대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탄원합니다. 아브넬을 죽인 죄에 대한 징계가 요압과 그 집안에 이르기를 탄원합니다(28-30).
그런 후에 다윗은 아브넬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릅니다. 온 백성들은 다윗의 모습을 보고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한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에 백성들은 다윗이 하는 일에 대하여 기뻐합니다(31-37).
디윗은 아브넬 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힘이 없음으로 인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힘이 없어서 통일왕국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요압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갚아 달라고 탄원합니다(38-39).
평화통일이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복수심이 낳은 처참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마26:52). 사적 복수로는 결코 평화와 통일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무력에는 전쟁과 죽음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압은 전쟁의 기술을 뛰어났지만 평화를 위하여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소인배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 없음을 슬퍼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는 일입니다. 자신의 검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합니다.
불의함에 대한 탄식은 폭력과 무력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복수를 위하여 대의를 거스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평화의 길을 용서라는 용기를 가지고 주님게 맡길 때 주어집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이러한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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