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6일
다만 허황한 욕심에 따라 구조화된 소수의 지배 세력에 의해서 희생되는 서민들과 약자들 및 그 소자들이 진정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지를 인류는 항상 고심해 왔다.
교회 위기는 사회의 위기
그런 정의를 위해서 권력을 위임받아 칼을 가진 자들은 거짓을 위장하는 인자들을 미리 정확히 분석하여 이웃에게 가장 선이 되게 칼과 권력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이념이 뒤따라 왔다. 그러면서도 칼과 권력을 사용하는 일에는 시기와 결단 및 수위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칼과 권력을 사용하는 인적 자원이 문제이면 그 칼과 권력은 사람들을 해치는 흉기로 변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속에서 한반도가 가치가 있는 것은 세계 앞에 행복한 나라가 되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은 인류 모두에게 참된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땅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 앞에 바른 교회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그 동안에 한반도는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이 간헐적으로 존속해 온 개혁교회가 꽃이 피고 장로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복된 땅이다. 그렇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처럼 그 복된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고 그 앞에 참된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있음을 잊는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한국에서의 위기는 모든 분야들에서 그런 복된 땅만큼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훌륭한 인적 자원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세웠다는 자들에게서 가장 쓰디쓴 피해를 느끼는 그 땅의 백성들에게 위기는 정치나 경제에도 있지 않고 진정 민주주의 이념 자체에 있는 것과 같이, 그 땅의 교회의 인적 자원들의 위기는 대 사회 앞에 진리에 대한 위기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오순절 운동과 혼동된 교회의 부흥과 세계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 앞에 마지막 몸부림을 친 결과로 생긴 근본주의 신학에 뿌리는 내리려는 순간, 진리에 있어서 신사참배와 같은 기독교의 가장 밑바닥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처를 입은 교회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상처는 온전한 교회로 회복되지 못하고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싸움은 그 싸움이 싸움 자체에 있으면 교회가 싸우는 대상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역사적 개혁교회가 도르트 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싸울 때, 기독교 구원의 먼 원인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전 성취를 파괴하는 것을 고려한 하나님의 예정론에 대한 싸움에 집착한 나머지 결국 아르미니우스가 처음 역사 속에 심으려는 타락을 고려한 예정론에 겨우 턱걸이하는 결정으로 전체
결정이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르트 회의의 정통성을 고집하면 할 수록 후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신
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었어도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으로 삼고 있는 장로교회는 그것을 극복한 유일한 개혁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에서의 핵심은 영원한 작정의 원인으로서 그 자신의 의지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의논에 있다고 했을 때, 그 ‘의논’이란 용어 앞에 붙은 형용사에 있고 같은 제3장 제5절에 있는 예정의 원인과 고려 내용에 있다. 즉 에베소서 1장 11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사로서 영원한 의논이란 표현에 하나님의 속성들이 나눌 수 없이 동시에 형용이 되었다는 것과, 생명으로 예정된 그런 인류를 하나님께서 그의 단순히 자유로우신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믿음이나 선행들 혹은 그들 중 어느 것 안에 보존이나, 피조물 안에 어떤 다른 것도 그를 움직이는 조건이나 원인들로서 미리 전혀 고려함
이 없이 예정하셨다는 표현에 있다. 예정에 있어서 죄나 타락 등 어떤 다른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귀중한 표현이 고백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같은 제3장 제6절에서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의한 모든 수단들이 예정되었을 때, 그 수단들 중에 대상에 대한 표현 다음에 택함이 있고 아담 안에서 타락이 있으며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구원의 서정들이 열거되어 있다는 데 있다. 카톨릭 신학과 도르트 회의를 극복한 또 다른 예가 예정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예정의 내용으로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백할 때, 창조 전(히 1:2; 엡 1:4-5; 딤후 1:9)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 독생자 주 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와 선지자, 제사장,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주, 만유의 후사 그리고 세상의 심판자로 택하고 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표현에 있다.
종교개혁정신 발판삼아야
그러나 이런 고백적 특징은 1580년대 이후의 개혁교회의 정통적 신학으로 겨우 회복된 것에 불과하다. 한국교회의 바른 개혁신학은 거기에 이어 시작하고 과학의 시대에 맞는 개혁신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 후 시대의 신학들을 모범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교회의 타락을 재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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