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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14: 하나님의 비상소집 (2005.03.12)

새벽지기1 2021. 4. 23. 06:29

 ● 평화복무  

 

유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우중충한 날이 계속되어서인지 괜히 심란합니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돌아와 사무실 문을 여니 마치 밤인 듯 싶게 어두웠습니다. 그 컴컴한 방에서 저는 둠즈데이(doomsday)라는 단어를 들은 듯 합니다. 잠시 그 어둠을 응시하다가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습니다. 방은 곧 환해졌지만 둠즈데이라는 불길한 단어가 제 마음에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창문 밖 저 멀리 전선에 앉은 까치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날갯죽지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모습이 꽤나 외로워 보이더군요. 물론 그 외로움은 제 심상의 반영일 터입니다. 오랫동안 그 새를 지켜보다가 문득 나를 지켜보고 있는 어떤 눈길을 느꼈습니다. 그 눈길은 품이 되어 저를 안고 있었습니다.    

 

책상 앞으로 돌아와 수선스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갈래 없는 생각이 경마장의 먼지처럼 떠올랐다간 곧 스러지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 '평화복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거의 자동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최소한 생애 중 일년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생의 현장에 들어가 평화복무를 하자고 권고하시던 유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평화복무'라는 그 낯선 말의 울림이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저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오래 전입니다만 소설가인 제 친구는 "나는 소설로 나의 인생에 복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평생을 걸 만한 일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나의 인생에 복무하고 있나', 간혹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데, 유 선생님은 '평화복무'의 길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당황하실지 모르겠네요. 예, 저도 압니다. 우리를 평화복무의 길로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제 시대에 양정고등학교의 교사이면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내셨던 김교신 선생은 "예수의 교훈을 자아의 주판으로써 적당히 할인하여 믿으려 함은 차라리 믿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면서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럼 누가 그 비상소집에 응할 수 있습니까? "성현을 찾는 자, 안전을 바라는 자, 중용을 밟으려는 자에게는 다 편한 길이 달리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보려는 자, 천국을 얻기 위하여서는 소유를 다 팔고 근친도 미워하며 자기 육신의 지체 일부씩을 베어 버릴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할 것이다." 평화복무에 나선 이들은 다 그 비상소집에 응한 사람이겠지요?    

 

신학교에 처음 들어갈 무렵 저는 찬송가 355장을 부를 때마다 갈등을 느끼곤 했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여기까지는 비장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었지만, 3절의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라는 대목에 이를 때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제 마음을 응시하곤 했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별다른 동요나 갈등도 없이 그 찬송가를 잘도 부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에 대한 진지함과 치열함이 식었기 때문일 겁니다. '평화복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렇게도 큰 떨림이 일었던 것은 제가 짐짓 외면하며 살았던 '다른 세계'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 눈뜨고 기도하라  

 

작년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신문 독자 투고란에 올라온 기도문 하나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인 문한별 씨의 <눈뜨고 기도하라>였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무고한 주검들이 나뒹구는데  눈감고 기도할 마음이 나는가?  당신은 찬양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비명소리 하늘을 찌르는데  화음 맞춰 찬양할 마음이 나는가?  야만의 시대에  눈감고 기도하는 건 비겁이다. 기만이다.  불의한 시대에  화음으로 찬양하는 건 동조다. 묵인이다. 

그대여, 기도하려거든 차라리 눈을 떠라.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대여 찬양하려거든  차라리 외론 목소리로 진혼가를 불러라.  

저기 당신의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부릅뜬 그의 눈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고요하게 관상기도만을 드릴 수 없는 그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쯤만 감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더욱 비참해집니다. 그의 기도문은 예언자의 음성이 되어 제 가슴을 쳤습니다. 이제는 눈을 뜨고 기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자책만 하는 것은 비겁입니다. 생의 승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는 것, 별별 추한 꼴을 다 보면서도 자기가 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평화복무'라 하여 모두가 고통의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정상에 오르는 이들을 위해 베이스 캠프를 지키면서 지원하는 이들도 있어야 하듯이, 자기 삶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싸우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진부하기까지 한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싹을 틔우려고 애쓰는 이들도 평화에 복무하는 이들입니다. 덜 쓰고 더 많이 나누는 사람들,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 정겹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 공격적인 말로 상대방을 수세로 몰아가지 않는 사람들, 상대의 말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궂은 일을 표나지 않게 처리할 줄 아는 사람들, 외로운 이들에게 다가가 가만히 손을 잡을 줄 아는 사람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들…. 이들은 알든 모르든 평화에 복무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너무 설교조로 말하고 있네요. 직업병이려니 생각해 주세요. 생각 같아서는 가볍게 말하고 싶지만 번번이 스스로의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언어가 무겁습니다. "나비야 청산 가자/호랑 나비야 너도 가자/가다가 날 저물거든/꽃 속에서 자고 가자/꽃이 괄시하면/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오늘 아침에 읽은 민요입니다. '그래, 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저는 무거움에 떨어지곤 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제가 지나칠 정도로 정신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까지 저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 말한 대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기에 인간이라고 생각에 경도되어 왔습니다. '쾌락에의 의지'나 '권력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사람을 분석하는 이들의 견해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것은 왠지 저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 짐짓 외면해왔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태도를 부추겼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혹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는 말씀은 저의 생각을 '의미' 쪽으로 밀어붙이는 구실을 했던 것이지요. 

 

● 기쁨의 원료  

 

하지만 저는 유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사람은 밥과 의미만 가지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독립전쟁과 종족간의 갈등으로 초토화된 동티모르 사람들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찾아온 평화 캠프 실무자들이 '화해와 재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자, 거기에 '축제'를 추가해 달라고 했다지요? "이 무서운 죽음의 벌판에서 무슨 축제냐"고 묻는 실무자들에게 그들은 "지금 우리가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말했다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서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장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삶의 의미'가 어떤 이들에게는 사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생은 생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의 여울 속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그 동안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기쁜 소식'을 뜻한다고 사람들을 가르쳐왔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안겨준 적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동영상으로 보여주신 동티모르인들의 축제장면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춤의 왕'이신 주님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조차 그 아름다운 춤판으로 불러 치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축제와 춤을 통해 그들의 잿빛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이 짓는 선한 웃음 속에서 화해와 재건의 해는 이미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그들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기쁨의 원료가 꼭 소비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배려야말로 마르지 않는 기쁨의 원천일 겁니다. 모리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이라는 책에서 "미국 사회의 정신적 몰락을 나타내는 증거는 미국인들이 점점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나 배려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더군요. 공공 장소에서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미군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곤 했는데, 모리스는 그것을 미국 사회의 정신적 몰락의 징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미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점점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와 예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유아론적 사고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진정한 우정은 때로 자기 초월이나 무한한 책임을 요구하기에 사람들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우정의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일상 속에서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보다는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감정적으로 쉽게 동화되는 것만 보아도 저의 판단이 그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야말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지켜주는 존재의 피부일 터인데, 그 피부가 점점 얇아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벗겨진 피부에는 비단 옷자락만 스쳐도 아픈 법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고통이나 외로움 앞에서도 비명을 지르는 까닭은 존재의 피부를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요즘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비전에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살해당한 자들의 마른 뼈들만 서걱거리던 계곡에서 에스겔이 대언하자,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그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습니다.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자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불어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곧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것을 은유로만 생각했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기어코 실현되어야 할 꿈인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이 더욱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 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렇지요. 아름다운 세상은 꿈꾸는 자들이 있어 열리는 것이지요. 그 꿈을 산 이들이 있어 열리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사랑의 피부 만들기  

 

이익과 권력과 명성에 대한 동경이, 싸구려 속물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라고 부름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비상 나팔소리는 이미 울렸습니다.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그 피해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토의정서 발효를 전하는 국내의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것이 한국 경제에 유리할 것인가, 불리할 것인가'를 저울질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에 발밭은 습성 때문일까요? 개도국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교토의정서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미국과 영국 등의 나라들은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나 배려'를 미국 문화의 몰락의 징조로 보는 모리스 버만의 진단이 다시 한번 국가적인 차원에서 확인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한 표현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현대문명의 위기를 꿰뚫어보면서 뭔가 지속 가능한 공생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고, 또 점차 그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의 비전대로 말하자면 힘줄이 뻗치는 것이라 할까요? '나비 효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프랙탈 이론을 끌어오지 않아도 '나'의 삶이 '너'의 삶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가 사랑인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지난 3월 10일자 신문은 남한과 북한의 전기가 57년만에 다시 연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지난 1948년 5월 14일 낮 12시에 '전기요금 미납'을 이유로 북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었던 전기가 다시 연결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움과 반목의 60년 세월 동안 남한과 북한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서걱이고 있었는데 이제 그 뼈들이 맞춰지고 힘줄이 뻗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한반도에서 열리고 있는 생명의 기적이, 역사의 새 봄이 기쁨의 살이 되어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어깨를 겯고 덩실덩실 생명의 춤을 출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의혹과 질시의 눈으로 서로를 겨눠보던 눈길을 거두어 상생의 길로 나갈 때, 하나님의 숨이 굳어진 우리의 가슴에 불어와 잠든 우리를 일으켜 세울 때, 우리는 평화의 군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송기숙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동네마다 후레자식이 하나"라는 말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레자식도 정자나무나 공동우물처럼 일정한 기능을 하는 동네의 구색"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이에 동네 사람들은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점검한다는 것이지요. 마을은 후레자식이나 좀 모자란 반편(半偏)이나 몸이 부실한 장애인들을 품고 가는 살림의 공간입니다. 그것을 사회적 피부라고 하면 어떨까요? 유 선생님과 동료들이 그렇게 세상 구석구석을 돌면서 평화에 복무하는 것은 지구촌에 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의 피부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3월 15일에 월드 서비스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다는 그 미국인 젊은이는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인간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사랑의 피부를 만들기 위해 땀흘리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저도 제 삶의 자리에서 평화에 복무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하나님의 비상소집 나팔소리가 제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는 초저녁, 말갛게 걷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푸른 언덕에서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