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하늘땅사람이야기11 : 스스로 길이 된 사람

새벽지기1 2021. 2. 4. 07:49

● 의외의 상황을 위한 여백 만들기  

 

새해에는 좋은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는 삶에 새로운 게 뭐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시간 속을 표류하지 않으려면 나름대로의 계획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학습 계획을 세우는 학생들처럼 할 수는 없지만, 시간의 매듭을 만드는 것은 삶의 지혜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년에 몇 차례씩 순례의 절기를 만들었던 이스라엘인들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집니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인가요? 잘게 분절된 시간 속을 걸어가면서도 '내 마음의 정처가 없구나' 하는 자각이 들 때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도 뭔가 가시적인 목표가 있을 때 '지금'이 탄력을 받는 것 같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곡과 봉우리들을 여러 번 넘나들어야 하는 것처럼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게 리듬인가요? 저는 가끔 집채만한 파도를 향해 나아가다가 그 파도의 마루에 날쌔게 몸을 싣고 파도를 즐기는 서퍼(surfer)들을 보면서 부러움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을 경험합니다. 안전한 땅 위에 서서도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문제일 겁니다. 가끔은 어긋나기도 하기에 인생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할 때는 치밀하게 준비하는 편이 못됩니다. 언제나 의외의 상황을 위해 여백을 마련합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스치는 어떤 풍경에 마음이 끌리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무작정 걷는 식입니다. 계획이 없기에 허허로울 수 있고, 허허롭기에 뜻밖의 만남에 대해 마음을 열 수가 있습니다. 삶에는 치밀한 계획도 필요하지만 어떤 상황의 소환에 언제라도 응답할 수 있는 여백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고집쟁이 영감의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걷는다』라는 책 제목이 하도 도발적이어서―제게 그렇게 들렸다는 말씀입니다―손에 잡았는데, 그 책이 그리고 있는 낯설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이 저를 영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에 이르는 12,000킬로미터의 실크로드를 그는 걸었습니다. 무모한 열정이었습니다. 그것도 60세를 넘긴 나이에 말입니다. 그가 직면했던 어려움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 강도,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군인과 경찰들, 질병, 외로움, 그리고 포기에의 유혹…무엇이 그를 그런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몰았다는 말은 적절치 않겠네요. 차라리 어떤 그리움이 그를 그 길로 소환했을까를 묻는 것이 낫겠습니다. "인생의 세 번째 시기에 나는 느림과 침묵에 굶주려 있다"는 그의 고백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이따금 멈추어 서곤 했다지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살아가는 우리는 영혼과 분리된 채 살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의 홍수 속을 표류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욕지기 같은 참담함이 밀려옵니다.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려운 것은 채 무르익지도 않은 말들을, 채 고이지도 않은 말들을 퍼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함을 알면서도 침묵을 선택하지 못하는 부실한 저의 믿음이 저를 괴롭힙니다.    

 

며칠 전 한 절친한 후배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3박4일 동안의 침묵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기간 동안 기도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눈길 안 주기와 손짓 안 하기를 포함한 절대 침묵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끔 별들한테, 그리고 산책길에 꽃들한테 말 걸기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바깥을 향하도록 철저히 훈련받은 시선을 안으로 돌리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그것을 문자를 터득하고 나서는 절대로 문맹이 될 수 없는 원죄 같은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이라지요? 부질없는 말은 만남을 매개하기보다는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 몸이 매개가 되지 않는 만남  

 

기자로 살아온 베르나르였기에 그는 말에 멀미를 느낀 것 같아요. 홀로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말을 버리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서로의 가슴에 아무런 울림도 일으키지 못하는 닳아빠진 말, 이해타산에 따라 발설되는 말을 버린 그 자리에서 그는 참다운 소통을 갈망합니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라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국의 풍물이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만남에의 갈망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과 서류와 우편물과 잡동사니로 가득 찬 제 사무실을 바라봅니다. 마치 내 내면의 풍경인양 어지럽습니다. 날마다 날아오는 우편물들을 어떤 것은 뜯어보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던지고, 어떤 것은 흘낏 한번 보고는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지는 나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권태와 짜증이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편물은 늘어나고 있지만 소통과 만남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앞에서 마음에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불시에 찾아온 낯선 이를 일단 미심쩍은 눈길로 훑어보게 됩니다. 낯선 이에 대한 '환대'는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전제조건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은 '한 소식'을 가지고 내 앞에 당도한 천사가 아니라 피하고 보아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조금 전에도 어떤 젊은이가 찾아와 일자리를 찾느라 이곳저곳 전화를 하다가 돈이 다 떨어져버렸다면서 3,000원 짜리 전화카드를 사달라고 하더군요. 마침 사용하지 않은 카드가 있어서 주었습니다만, 그 젊은이는 정말 전화카드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전화카드를 빙자한 돈이었을까요? 추위에 몸조심하라고 말했지만 제 말속에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었는지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을 꺼리게 되는 이 모순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몸으로 그들 곁에 다가서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몸이 매개가 되지 않은 만남은 진실하기 어렵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몸을 만짐으로써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몸이 가지 않는 곳에 마음이 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려면 몸부터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존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했던 바울의 능소능대한 자유는 몸으로 사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생의 별천지일 겁니다. 땀을 흘리며 사는 사람,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통과 처절한 외로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야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초월이 일어나는 거지요. 몸이 따르지 않는 관념은 우리 삶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몸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열병 들린 시몬의 장모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고, 한센병 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고, 앞 못보는 사람의 눈을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동료 인간들의 아픔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담긴 그 손길이야말로 살림의 손길일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사해의 호반』이란 소설에서 그린 예수의 모습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그는 병자를 낫게 하지도 못하고, 기적을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버림받은 병자들 곁에 머물면서 안타까워하며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울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무능을 비웃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엔도는 진정한 기적은 병자를 자리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벗이 되어주는 영혼의 온기임을 넌지시 일깨워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능력은 없다 해도 어려운 사람들 곁에 다가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퇴화되어버린 심해어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들 곁에 다가서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스스로 길이 된 사람  

 

예수께서 버림받고 주변화된 사람들 곁에 선뜻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길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길의 사람은 제도와 관습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 속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는 늘 벗어납니다. 그렇기에 불온해 보입니다. 그는 잘 닦여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길이 된 사람의 운명은 평탄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베르나르의 이야기를 인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걷는다는 건 모든 접촉에 노출된 일이다. 따라서 호의도 악의도 모두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침대에서 죽기를 바랐다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되뇝니다. 모든 접촉에 노출될 각오가 된 사람만이 길을 나설 수 있고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타자들의 시선과 침입을 막기 위해 담을 높이 둘러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길 떠나가기를 잊고 삽니다. 악의(惡意) 앞에 노출될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한 만남을 위해 자기를 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행은 비근한 일상을 떠나 비일상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거나, 일상의 삶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 경우이든, 길 위에 선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여행은 자기와 만나기 위한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와의 만남이든 타자와의 만남이든 진정한 만남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 요구 앞에 설 용기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취약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길을 떠나지 않습니다. 키 큰 나무가 우듬지 끝까지 물을 공급하는 것을 삼투압의 원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지요? 나무의 흔들림이야말로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리는 펌프질이라는 겁니다. 나무를 흔들어대는 바람은 고마운 바람인 거지요. 젊은 시절부터 저는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시인 오규원님의 시구를 즐겨 읊조렸습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부분 나는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은 직선이다' 하면서 앞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들의 성취에 대한 부러움은 물론 아닙니다. 의심의 여백이 주어지지 않은 믿음이 독단이 되기 쉬운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리는 이들이 보이는 경직성이 안타깝기 때문일 겁니다. 나무는 흔들림 없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고, 줄기도 높이 뻗을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짓는 까치처럼 우리도 어쩌면 흔들림 위에 서있을 때라야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직선의 시간을 넘어  

 

위험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넘어지기를 두려워하면 자전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수영장 물을 마실 각오 없이는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악의를 꺼리면 길을 떠날 수 없고, 특히 '그 길'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떠남은 어쩌면 비약이고 도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꼬꼬댁거리며 개에게 쫓기던 닭이 어느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위기가 없었다면 닭이 지붕에 오르진 않았겠지요. 혹시 지붕에 오르는 취미가 있는 놈이라면 몰라도. 어느 선배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이들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는 세태를 탄식하다가 스스로에게 정직(停職)을 명하고 정들었던 목회지를 떠났습니다. 어떤 힘이 그를 그 도약대에 서게 했을까요? 그 도약대에서 바라본 세상풍경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요?   

 

마틴 부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삶은 만남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말일 겁니다. 세상에는 방점을 찍듯 단 한번의 만남으로 우리 존재에 불꽃을 당기는 만남이 있습니다. 만해는 그것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했지요? 그런가하면 아주 서서히, 지속적으로, 둔중하게 우리 마음의 거문고를 울리는 만남도 있습니다. 내가 걸어온 생의 궤적이라는 것도 사실은 다양한 만남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하나의 만남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가 제 마음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대목이 있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추억담입니다. "댁에서 시내까지 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선생님과 함께 가면 한 시간, 어떤 때는 두 시간씩 걸리는 거야. 하나 바쁜 게 없어.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일일이 인사를 나누시고. 길가에 포장마차가 있으면 거기 들어가서 또 얘기를 하시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 '그래,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냐?' '하는 일은 잘 되냐?' '아버지는 안녕하시냐?' 이렇게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누가 배가 고픈지, 추운지, 울고 있는지 다 알게 되지."(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25쪽) 직선의 시간을 숨가쁘게 살아가는 이들은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생의 넉넉함이 이 곡선의 궤적 속에 있습니다. 가속 페달을 깊이 밟을수록 시야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인생 별 거 있나요? 그렇게 숨차게 달려봐야 결국 한곳에서 만날 텐 데요. 저는 가끔 믿는 이들의 손에는 사랑의 레가토가 들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해요. '레가토'는 음악용어인데 몇 개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 부르라는 표시라지요? 화살을 쏘아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처럼 믿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 단절되어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레가토를 그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미워하고 편을 가르는 일은 제아무리 고상한 이념으로 무장을 했다 해도 악마의 소행이 아닌가 싶어요. 무속에서도 사람이 저승에 가면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 데, 그 중 하나가 다리를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건너도록 해주었는가(越人功德)이라지요? 담은 허물고 다리를 놓아주는 게 믿는 이들의 삶인 줄 알겠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요' 하는 유행가 가사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인생 길 어느 구비를 돌다가 만나 길벗이 되었든 모든 만남은 우리를 자기 초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잘못 살지는 않았다',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요즘입니다. 늘 여여한 모습으로 제 곁을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시린 손을 잡아주시고,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사랑의 레가토를 내 손에 들려주시는 그 우정이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도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근 채 징검돌 하나를 놓고 계시지요? 조만간 그 자리에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