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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9 : 경계를 넘어

새벽지기1 2021. 1. 27. 06:40

● 틀과 역동성 사이의 긴장   

 

"무슨 영화 보고 왔니?"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village)요."  "어떤 내용인데?"  "공포 영환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구요. 시간적 배경이나 공간적 배경조차 알 수 없는 어느 외떨어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어요. 그 마을의 한계는 숲이었는데, 그 숲에는 괴물이 살고 있어서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마을 사람들을 지배해요."  "결국 영화는 그 두려움을 깨고 누군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 구조겠네."  "맞아요. 그런데 그 인물이 이 영화에서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아가씨라는 게 다르다면 다른 거죠."  "아가씨는 '순수함'을 표상하는 존재이니까 또 다른 의미의 영웅일 수도 있지. 게다가 앞을 보지 못한다니까 보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롭겠고. 그런데 그 아가씨가 마을을 벗어나는 까닭은 뭐야?"  "약혼자가 피습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약을 구하러 숲을 통해 외부 세계로 나가게 돼요."  "결국 '사랑'이구나. 사랑은 일쑤 어떤 한계를 벗어나도록 하는 힘이니까."  "나중에 밝혀지는 바이지만 숲 바깥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예요. 마을의 원로들은 그 세상에 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고요. 그래서 그들은 외딴 곳에 마을을 세우고 괴물이 사는 숲 이야기를 만들어 마을 공동체를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지키려 했던 거지요."  "영화에서 마을의 원로들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니, 아니면 마을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그런 대로 긍정적으로 그리니?"  "쉽게 판단할 순 없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구나. 선과 악의 단순 구도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 영화를 보면서 뭔가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법이네."  "엉터리이긴 해도 나도 철학과 학생이에요."  "그래, 누가 뭐랬니? 어쨌든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벽을 향한 채 그림자를 실상으로 알고 살아가는 수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구나. 원로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두려움에 얽매여 행동의 자유를 제약받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까 싶어요. 그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도 넘지 못할 어떤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가치관이나 제도 따위 말이지요."  "생명이란 어쩌면 틀을 지어내려는 구심력과 그 틀을 부정하려는 원심력 사이의 균형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틀을 깨려는 역동성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틀 그 자체를 악으로 보고 적대하는 태도도 역시 문제야. 모든 이원론적 선택에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게 마련이거든." 

 

● 홀로 족한 자, 공감하는 자   

 

"문제는 그 균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칫하면 타성에 짓눌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 타성은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는 것이고, 공간 속에 고착하려는 욕망이지. 말이 좀 어렵게 됐나? 어쨌든 젊음의 특색은 '부정정신'이 아닐까 싶어. 불온하지 않은 젊음은 보기에도 딱해 보이거든. 어느 곳에서나 반듯한 모범생들을 보면 숨이 막히거든."  "그래도 어른들은 그런 이들을 좋아하잖아요?"  "대체로 그렇다고 봐야지. 그들은 다루기 쉽거든. 하지만 어른들의 마음에는 이중감정이 있는 것 같아.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뭔가 기존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보면 한편에서는 마음이 불편해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흐뭇한 생각이 들어."  "대광 고등학교 학생 강의석이 생각나네요. '헌법에 보장된 종교 자유를 찾기 위한 싸움에 나서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지켜주지 않는다는 법치국가 대한민국, 우리의 노력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찬 하루입니다.' 저는 강의석 학생의 눈물겨운 투쟁을 바라보면서 올림픽 금메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감동을 느꼈어요."  "그랬니? 나는 부끄러웠단다. 저 어린 학생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인권의 지평을 넓혀놓고 있구나, 생각하니까 전율이 느껴지더라. 왜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봄의 소망은 일깨운다는 말이 있지 않니? 강의석 군은 모두가 길들여져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이끌어내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기까지 했어."  "그 뒤에 시민단체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강의석 군의 투쟁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야. 그는 어떤 의미에서 징검다리의 밑돌 하나가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몰라. 자신은 차가운 물 속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은 편히 건너가도록 해주는…."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 안에서 생활해 왔으면서도, 때로는 정체성의 점이지대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다른 문화나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나 스스로가 모욕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오히려 다른 종교에 매력을 느낄 때가 많아요."  "사람에게는 대안동경이라는 게 있대. 이곳보다는 강 건너 저편이 더 아름다워 보이잖아. 도회지의 삶이 힘겨우면 사람들은 가끔 '에이, 농사나 지으며 살까?' 하지만, 농촌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지. 다른 종교에도 역시 우리가 안고 있는 것만 동일한 문제가 있을 거야."  "문제는 기독교가 너무 편협해 보인다는 점이에요. 나는 교리에 대해서도 무지하지만 보수적인 기독교인일수록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틈이 거의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강의석 군이 제기한 문제는 '학교 종교 의식 참여에 대한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기독교 계통 학교마다 비상이 걸렸더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기회로 삼으면 좋을 텐데, 다들 문제를 봉합하려고 서둘기만 하더라."  "저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보았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조차 찾으신다니까, 교칙과 제도를 어기고 기존 질서에 대해 물음표를 붙였다하여 한 학생을 학교 밖으로 내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오히려 그를 대견하게 여기지 않으셨을까요?"  "네가 믿는 예수님은 참 멋진 분이구나.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가르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더구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  "와, 공감이 가네요."  "그럴 줄 알았어. 사랑이란 결국 다른 이들의 돕기 위해 안락한 골방에서 벗어나는 자기 초월이 아니겠니?"  "사랑이란 결국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겠네요."  "자비란 자애로움과 너의 아픔에 대한 슬픔의 결합이잖아. 우리는 이걸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뭐겠니? 결국 우리의 죄에 대한 슬픔이고 우리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 징검돌이 된 사람들   

 

"그러니까 저는 기독교 학교의 기독교 교육이 강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비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면서, 서로의 차이조차 사랑으로 포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게 진정한 기독교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옳은 이야기야. 하지만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진 않겠지. 그래도 이제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시기가 도래한 건 분명해. 학교의 건학 이념과 학생의 인권 문제가 부딪쳤을 때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번에 대광 고등학교는 모든 교직원들이 참여한 진지한 논의 끝에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결정을 했는데, 이건 굴복이 아니라 하나의 도약이라고 보아야 할 거야. 종교 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것이 곧 선교의 좌절은 아니거든. 오히려 비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정신을 드러내고, 비종교인이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라고 할 수 있겠지? 이런 도전은 궁극적으로는 기독교는 발전을 가져올 거야."  "아까 말씀하신 대로 강의석 학생의 투쟁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징검돌 하나를 놓은 셈이네요."  "그래, 청년 시절의 아빠 또래의 젊은이들은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들으면 살았단다. 세상에는 징검돌이 된 사람들이 꽤 있어. 문익환 목사님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남과 북 사이를 잇는 징검돌 하나를 놓았고, 오태양 씨는 양심적 병역 거부의 징검돌 하나를 놓았고, 탤런트 홍석천 씨는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라는 징검돌 하나를 놓았지. 그들은 한결같이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어."  "기존 체제는 그들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잖아요."  "칭찬을 기대하고, 안락을 추구한다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겠지. 살다보면 어둠에 온 몸으로 부딪혀 나가 조그마한 불빛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어. 삶의 격전장에서는 당파성을 견지해야 할 때도 있어. 하나님도 가난한 사람들 '편'을 드시잖아. 산술적인 공평무사함이 때로는 불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기존 질서에 순치된 사람들 말고, 좀 투박하더라도 현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좋더라.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이재무의 <땡감>이야. 여름 땡볕 옳게 이기는 놈일수록  떫다 떫은 놈일수록 가을 햇살 푸짐한 날에 단맛 그득 품을 수 있다 떫은 놈일수록 벌레에 강하다 비바람 이길 수 있다 덜 떫은 놈일수록  홍시로 가지 못한다 아, 둘러보아도 둘러보아도 이 여름 땡볕 세월에 땡감처럼 단단한 놈들이 없다 떫은 놈들이 없다   "강의석 학생은 그런 의미에서 '떫은 놈'이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자들의 횡포에 대해 대놓고 저항하지는 못하고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왜, 떫어?'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었는데, 그때 '그래, 떫어' 하고 말해야 우리 정신이 크는 건데…. 나는 덜 떫은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좀 안타깝더라."  "그래도 좀 떫게 굴면 싫어하시잖아요?"  "그건 그래.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상생을 위한 떫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충족을 위해 떫다가는 버림을 받기 십상이라는 거지. 떫음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야. 가을이 되면 단맛을 품어야지. 인생의 가을이 되었는데도 떫기만 한 사람들도 있거든."  "작정한다고 단맛이 품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 삶의 지향   

 

"그럼. 하지만 지향은 분명해야지. 나는 여름날 땡감처럼 단단하던 사람이, 어느 결에 제 풀에 물러져서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더라. 정말 사람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이 늘 동일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향은 같아야 하는데, 지향 자체를 바꾸는 사람들을 보면 슬퍼지더라."  "지향을 바꾸는 이유가 뭘까요?"  "낸들 알겠니. 하지만 짐작이 가는 점이 없지는 않아. 어쩌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 건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명을 받는 자리에 앉고, 자기의 말이 권력이 되는 걸 경험하고, 물질적인 안락함에 길들여지다 보면 어쩔 수 없지. 그의 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마음의 가난함이 사라지는 거군요."  "맞아. 피에르 신부님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뜻을 새롭게 해석하더라. 그건 성 프란체스코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거야. 그가 국가의 원수이건 회사의 우두머리이건, 또는 노동조합 책임자이건, 교사이건,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라고 자문하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자래."  "마음에 와 닿네요. 그동안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렇지? 하지만 마음의 가난함이란 생활의 청빈함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어. 부유함을 누리면서 마음의 가난을 운위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니까."  "하지만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너무 가난하면 정신이 각박해지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부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데 가난을 면치 못하면 정신이 각박해지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사람들의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지 않을까?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했다는 말은 그러니까 자기 삶의 경계선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로 나아간다는 말이겠지.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롬12:16)고 했어."  "자기 삶의 경계선을 넘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영화 <빌리지>의 숲처럼 다른 세계는 늘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걸요."  "하지만 낯선 것과의 대면이야말로 내가 커지는 기회가 아니겠니?"  "사실 경계선 너머에 있는 타자들의 세계도 그렇게 낯선 세계는 아닌 데 왜 지레 겁부터 내는지 모르겠어요."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경계선을 넓혀 더 많은 사람들과 생명들을 품에 안는 것이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