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하늘땅사람이야기12 :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

새벽지기1 2021. 2. 12. 08:01

● 사람이 된다는 것  

 

김 선생님, 지금쯤 서남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머물고 계시겠지요? 지진과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태국, 몰디브… 그곳이 어디이든 퀭한 눈망울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말없이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실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해일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제일 먼저 제 입에서 나온 탄식은 "왜 하필이면 그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들려온 소리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13:2-3). 그 다음에 제 가슴에 해일처럼 밀려든 감정은 살아있음의 슬픔이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새삼스런 눈뜸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이렇게 넋이 빠져 당황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단출하게 짐을 꾸려 그곳을 향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가볍고 날랜 운신을 보면서 저는 또 다른 부끄러움을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절망의 소금 땅이 조금씩 일어서고 있음을 저는 감동적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재난에 걸려 넘어진 땅을 딛고 일어서려는 생명의 견고한 의지 때문이겠고, 그 의지에 힘을 실어주는 세계인들의 따뜻함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려는 비정부기구 사람들, 여행자로 그곳에 갔다가 차마 그 참상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자원봉사자로 나선 사람들, 소액 기부자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희망적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에덴의 동쪽에 사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믿기 어려운 시련을 통해 우리 인류의 정신사가 한 단계 발전하게 해주십시오. 역사의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인류의 가장 숭고한 정신이 탄생했음을 기억합니다. 이 참혹한 사태를 통해 인간됨의 본질을 통찰하게 하시고, 피부색·인종·민족을 넘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가족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게 해주십시오. 세계인들이 함께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이 서로를 갈라놓던 분열의 담장을 허무는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흐름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체와의 관련을 잃은 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됨의 길을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목말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일 거구요. 그런 의미에서 김 선생은 참 행복한 분입니다.

 

● 행위로 이해하기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런 분쟁 지역과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느냐는 제 물음에 김 선생은 "기도를 하는 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문현답이었던 셈입니다. 그렇지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비(compassion)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라지요? 그 마음을 잃어 저는 이렇게 황량한 빈들에 선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혼도 못하고 가는 것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김 선생은 "사랑하러 왔다가 사랑에 이바지하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샤르댕 신부의 말을 들려주면서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그 마음 하나 먹기가 그렇게도 어렵습니다. 저마다 자기 마른 목을 채우느라 바쁘니 말입니다. 카잔차키스의 <<미칼레스 대장>>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미트로스라는 크레타의 젊은 용사가 세파카스라는 백발의 노인을 찾아옵니다. 젊은 용사는 그 노인이 불사신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르신네." 젊은 용사는 노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르신네께서는 거대한 상수리나무처럼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르신네께서는 폭풍을 숨쉬시며 백 년 간이나 괴로워하시고, 이기시고, 싸우시고,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르신네, 백 년을 살아 보시니까 인생이라는 게 어떤 것 같았습니까?"  "시원한 물 한 사발 같았네." 노인이 대답했다.  "아직도 목이 마르십니까?"   백발의 노인은 팔을 쳐들었다. 저고리 소매가 넓어 스르르 내려앉으면서 깡마르고 주름진 팔이 어깨까지 드러났다.   노인은 큰소리로 마치 저주라도 내리는 듯이 호령했다.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 책을 읽을 즈음 저는 구태의연한 일상에 어지간히 지쳐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존재로서의 저의 목표는 늘 그만한 거리를 유지한 채 신기루처럼 부유하고 있었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그려지고 있는 어깨 든든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숨이 조금씩 가빠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이 한마디―"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는 쇠도리깨가 되어 제 정수리를 내리쳤습니다. 다 채우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마련하고 사는 것이 참 삶임을 그때처럼 또렷하게 자각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뭔가 생의 비의의 문이 열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도 반복되는 일상의 풍화작용을 견딜 수 없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일상은 다시금 강력한 아귀힘으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몸으로 살지 않고 머리로 사는 자의 한계가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저는 눈물과 아픔이 있는 곳이면 형편이 어떠하든지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김 선생의 그 심플한 삶을 그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색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행위로 이해한다는 말을 이제는 알듯합니다.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팔을 붙잡고 있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 누가 괴물인가  

 

말을 여기까지 이어왔지만 더는 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네요. 사실 저는 지금 참담한 심정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어느 유명한 목사가 설교 중에 했다는 말 때문입니다. 그는 "서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바닷속 지진과 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또 "8만5천명이 사망한 인도네시아 아체라는 곳은 3분의 2가 이슬람교도들인데 반란군에 의해 많은 크리스천들을 죽인 곳이고, 3∼4만 명이 죽은 인도의 첸나라는 곳은 힌두교도가 창궐한 곳인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고 교회가 파괴됐고, 스리랑카 역시 불교의 나라로 역시 반란군에 의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천박한 한 영혼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말과 행실로서 자기 속에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저는 그의 말속에 담긴 소름끼치는 폭력을 봅니다.    

 

폭력은 은둔자의 기도 속에도, 고행 속에도, 뭔가를 이루어냈다는 행복감 속에도 깃들게 마련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둔감한 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의 매혹에 사로잡힙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해석의 권한을 주었다는 말입니까? 욥이 겪는 참상 앞에 넋이 빠져 말조차 잊은 채 칠일칠야를 보냈을 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우정의 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욥의 불행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들 눈에 '괴물'처럼 보였을 욥이야말로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저는 이웃의 고통에 화육하기보다는 해석의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들이 횡행하는 이 거리를, 그리고 교회를 두려움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그러한 해석이 곧 폭력임을 모르는 것일까요? 고통의 현장으로 달려간 사람, 넋을 잃고 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퀭한 눈망울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단정적인 말을 할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너무 많습니다. 욥은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12:5)고 말합니다.   

 

이번 사태를 놓고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눈을 감은 선지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으로 빚어지는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부르짖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은 저들의 죽음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우리는 별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또 다시 옛 생활로 복귀할 것입니다. 큰 차를 타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면서. 정말 그런 겁니까? 저는 진정한 복이란 많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많이 절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를 비우지 않고는 마음도 비워질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주님의 말은 폐기 처분한 것입니까?   

 

매스컴은 일본과 호주를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구호금의 액수를 늘리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국가'라는 단위가 하는 일에 인간의 존엄이나 도덕의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벌거벗은 이익만이 있습니다. 너무 비관적인 전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선교의 불모지였던 그곳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저는 그들의 광신적 열정에 분노합니다. 그들에게는 선교의 대상만 있지,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은 없는 것인가요?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이지 '선교사'가 아닙니다. 사심 없는 우리의 우정과 사랑을 통해 그들이 복음의 정수를 맛보게 되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나눔과 돌봄에 숨겨진 저의가 있다면, 설사 그것이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라도 해도 순수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 타인과 공감하는 자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한 피에르 신부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는 그들 스스로가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구분이 있다면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타당한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정말 그가 말하는 그런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하나님은 비열하고, 완악하고, 오만하고, 인색하고, 음란하고, 경건치 않은 사람들까지도 품어 안으려고 스스로 상처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절망의 심연을 본 사람들 때문에 겪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자비심이라지요? 저는 비속한 사람들의 악덕을 보면서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랑만이 세상의 소외를 극복하는 단 하나의 길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를 미워할 것 같습니다. 이런 예감이 저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전에 잘 알고 지내는 공직자 한 분이 제게 말하더군요.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죄는 미워해야 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악인이 있어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저는 쓸쓸하게 흔들리는 그분의 눈빛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분은 슬픔과 분노와 비탄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시편 시인의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용돌이처럼 우리 마음을 휘젓는 거친 말들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의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진실 앞에 서도록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도 했습니다. 너무 안이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세상의 심연 앞에서 너무 쉽게 눈을 감았어요. 이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우리 동료들이 그 목사가 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공분도 없었습니다.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건가요? 거룩한 분노가 없는 종교는 살았으나 죽은 것 아닌가요? 온몸으로 살아가시는 분에게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이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답답하고 울울한 심사를 도무지 가눌 길이 없어 그럽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세요.

 

● 하나님을 믿는 가시적 징표  

 

편지가 너무 우중충해졌지요?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꿔야겠습니다. 지진과 해일 피해를 입은 나라들을 돕기 위해 각 나라마다 모금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하나의 통계 숫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르웨이 국민들은 대략 1인당 약 40달러의 구호금을 구호단체에 기부한 데 비해 우리 나라 사람들은 1인당 약 20센트 정도를 냈다더군요. 이게 정확히 우리 정신의 현주소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20%가 넘는다는 자랑이 무색할 지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은 사람들의 형제됨을 통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돈지갑의 회개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자진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가시적 징표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눔의 동기는 물론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또한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나눔의 행위가 일쑤 자기 만족을 위한 허영심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實踐이란 단어에서 '천踐'은 '발 족足'에 '창 과戈'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실천은 마치 창날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새겨봅니다. 그렇지요. 누군가를 물질적으로 도우면서 그에게 굴욕감을 덤으로 얹어준다면 곤란한 일이겠지요. 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 중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의 허세부리는 태도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이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지진과 해일로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우리 정신의 진일보를 위한 초석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재앙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느 곳에 계시든 평화의 씨를 뿌리시는 김 선생 같은 분이 계시기에, 우리 시대에 드리워진 어둠 앞에서 절망하는 것조차 사치임을 자각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많은 이들의 좋은 벗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