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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15 : 정신의 독립군

새벽지기1 2021. 6. 30. 07:06

● 자기 확장의 기회

 

세상이 다 고요한 듯 싶구나. 모처럼의 휴일이어서인지 옆에 있는 공업사에서 들려오던 소음도 그치고, 재잘거리며 복도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고요함이 어찌나 좋은지 음악조차 틀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한가함을 만끽하고 있단다. 뒤꼍 문을 여니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수수꽃다리 새잎과 눈길을 주고받고 있더구나. 조심스런 눈길로 녀석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마치 누군가의 밀회 장면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더라. 새의 말을 알지 못하니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봄 신명에 지핀 생명은 매 일반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새의 벗되기를 자청해보았지. 새는 마치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연신 꽁지를 까딱거리더구나. 잘 지내고 있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가 활기찬 것 같아 안심이다. 일년 동안 머물게 될 방이 전망도 좋고 깨끗하다니 다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야. 말도, 생활 방식도, 생각의 결도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어.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여기곤 하지. 어쩌면 그게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발전시켜온 내재적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것과의 만남이야말로 자기 확장의 기회가 아니겠니?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타자'라는 거울 앞에 섰을 때뿐이란다. 반성이란 정신의 자기복귀라지? 타자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내가 다시 바라보면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해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니겠니?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은 나 자신에 대한 엄밀한 인식으로의 초대이기도 하단다. 세상이 좁아져서 이제는 그런 일이 없겠다만 코가 높고 눈이 푸른 서양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조선 사람들이 느꼈을 당혹감을 생각해보아라. 그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심각한 내적 고투를 겪었을 거야. 그 벽안의 외국인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틈입해 뭔가 균열을 만들어냈을 테니 말이야. 누군가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속에서는 갈등이 시작되지.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혼용하고 있는 우리 말살이의 무의식적인 뿌리는 낯선 것에 대한, 아니 어쩌면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젊은이들의 문화를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싶을 때가 많단다. 의미보다는 재미에 더 집착하고, 끈끈한 정(?)으로 맺어지기보다는 플래쉬몹처럼 이벤트성 만남을 즐기고, 이종격투기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마치 외계인을 바라보듯 하는 나의 시선을 스스로 의식할 때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그 한계를 벗어나기가 참 어렵구나. 말이 빗나갔다만 낯선 것과의 열린 만남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하다.

 

13세기의 아프가니스탄 시인인 루미의 시를 들어보겠니? 인생은 여인숙(旅人宿) 날마다 새 손님을 맞는다. 기쁨, 낙심, 무료함, 찰나에 있다가 사라지는 깨달음들이 예약도 않고 찾아온다. 그들 모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해라! 그들이 비록 네 집을 거칠게 휩쓸어 방안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슬픔의 무리라 해도, 조용히 정중하게, 그들 각자를 손님으로 모셔라. 그가 너를 말끔히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어두운 생각, 수치(羞恥)와 악의(惡意)가 찾아오거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아들여라. 누가 오든지 고맙게 여겨라. 그들 모두 저 너머에서 보내어진 안내원(案內員)들이니. 반복해서, 천천히 이 시를 읽다보면 삶의 실상에 조금은 눈을 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하는 현실은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픔이든 평안이든 모두 저 너머의 세계에서 보냄을 받은 안내원들이란다. 물론 그것은 자기 삶을 중심을 향한 여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 쉽지는 않겠지만 현실의 모든 국면을 나를 찾아온 손님으로 여겨 정중하게 모신다면 그 손님이 우리를 말끔히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하지 않겠니? 맥없이, 자각 없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매 순간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빛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상을 반성의 체로 걸러 소중한 것들을 갈무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종의 수행의 방편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 만파식적은 없어도

 

너도 그곳에서 뉴스를 통해서 보았겠지만 지금 온 나라가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독도 문제 때문에 떠들썩하단다. 하필이면 이런 때 네가 그곳에 머물게 된 뜻이 무엇인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일이겠다만, 어느 곳에 있든 주체성을 잃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해. 지금 일본이 우경화 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군국주의의 길에 접어들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거야. 지금 미친 바람이 세상에 불어닥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으니 문제로구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 기억나니? 내가 언젠가 들려준 적이 있는데.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를 일컫는 말이야. 그것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동해의 어느 섬에서 베어낸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 왕이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질병이 없어지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졌다더라.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만파식적은 전쟁과 재해로 고통이 자심하던 민중들의 염원의 결정체가 아닌가 싶어. 그런 피리 하나 손에 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만파식적은 못되더라도 희망의 피리를 손에는 놓는 일은 없어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독도로 몰려가고, 태극기를 꽂고, 무궁화를 심는다고 야단이다. 친미 시위를 주도하던 보수 단체 사람들이 반일 데모에 앞장서서 과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배타적 민족주의는 또 다른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과 민족의 힘 겨루기가 아니다. 언젠가 미국의 고위관리가 대한민국의 주적(主敵)이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윽박질렀을 때, 여러 사람들이 한 말이 생각나는구나. 대한민국의 주적은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이라는 거지. 옳은 말이야. 지금 우리의 현실은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집단적 주술을 통해 힘이라는 악마를 부활시키고 있는 형국이야. 따라서 우리가 겨뤄야 하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일본이 아니라, 극우 세력들이 지향하고 있는 패권주의일 거야. 우리는 일본의 양심 세력들과 연대해야 하는데, 많은 양심 세력들도 독도 문제 앞에서는 몸을 움츠리고 있다고 하더구나. 하긴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조국 폴란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지 않던? 사람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서 세상과 인생을 보는 방식이 달라지게 마련이야. 그걸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겠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할 거야. 하지만 이번 부활절을 지나면서 내 마음에는 한가지 확신이 찾아왔단다. 그것은 문제는 직면해야만 해결된다는 것이야.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향해 가던 여인들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어. 무덤을 막아놓은 그 무거운 돌덩이를 어떻게 굴려야 하나, 아무 마련이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 돌문은 이미 굴려져 있었다지? 나는 요즘 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단다. 벽 앞에 서서 낙심하기보다는 문 없는 집은 없다는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찾다보면 길은 보이게 마련이야.

 

● 영혼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

 

물음 속에는 벌써 답이 내포되어 있다지? 일본 친구들과 교착상태에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얼굴을 붉힐 일도 생길 거야. 하지만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안일하고 얼버무리는 듯한 미소로 문제를 덮어두려고 하지는 말아라. 인내를 가지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되 쉽게 감정적이 되지 말고, 또 네 생각도 분명하게 말해주려무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차이는 일단 차이대로 놔두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 나태한 정신은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목소리를 숨기기도 하지만, 나는 네가 차이를 차이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로 이것이 정신의 독립이 아니겠니?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언어와 입장에 편승하기보다는 스스로 철저히 검토해보고 내린 결론이라면 비록 그것이 편견일지라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해. 물론 여기에는 잘못된 것이면 질정을 받겠다는 열린 태도가 필요하지. 이 길은 고단한 길이야. 니체가 <교육자 쇼펜하우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더구나. [한쪽 길로 가면 시대의 환영을 받는다. 시대는 꽃다발과 보수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 유력한 정당이 그를 지지해 줄 것이며, 앞이나 뒤에는 많은 동지들이 함께 할 것이다. 앞 사람이 암호를 발하면 전 대열이 반응한다. 이 길에서의 첫 번째 임무는 '대오를 맞춰 싸우라'는 것이고, 두 번째 임무는 대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취급하라는 것이다. 다른 길로 가면 길 자체가 험준할 뿐 아니라 동행자도 드물 것이다. 이 길을 택한 자는 고생하면서 걷게 될 것이고 자주 위험에 빠질 것이다. 때문에 첫 번째 길을 가는 사람들로부터 꼬드김이나 조롱을 받기도 한다. 언젠가 두 길이 교차하면 그는 구박을 당해 내동댕이쳐지거나 고립될 것이다.]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연한 것 같지 않니?

 

나는 이 시대가 정신의 독립군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 '돈'과 '힘'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목덜미를 죄어치는 시대일수록, 대오를 이탈해 탈주를 거듭하는 정신의 독립군이 꼭 필요한 것 아니겠니? 젊음의 특색은 불온함이라는 데,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투항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네 또래의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더라.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신의 영혼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앞서 있는 실질적인 사람"이라고 했어. 하지만 정신의 독립군으로 살아간다는 게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야. 선한 일을 위해 연대할 줄도 알아야 사람이지. 자기를 닦기 위해 선택하는 자발적인 소외는 필요한 것이지만, 연루되기가 싫어서 현실에 눈을 감는다면 그건 도피가 아니겠니? 너도 나를 닮아서인지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더구나. 어떤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일 자체가 주는 부담이나 어려움보다는 그 일에 동참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낙심될 때가 많더라. 하지만 함께 하지 않음으로 세상이 더 나빠진다면 차선이라도 택하는 것이 용기일 거야.

 

● 희망은 힘이 세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서인가? 나는 혼자서 성취한 큰 일보다 함께 성취한 일이 더욱 미학적으로 완전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어른들이 가래질을 하는 모습에 매혹 당하곤 했단다. 장부잡이가 자루를 잡고 흙을 떠서 밀면 양쪽에 있는 줄꾼 두 사람이 군두 구멍에 연결된 줄을 당기어 흙을 던지는 그 리듬이 어찌나 멋지든지, 나는 줄꾼 역할을 자청하곤 했어. 고맙게도 어른들이 그 일에 나를 끼어주었기에 나는 지금도 그 리듬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단다. 써레질이 끝난 논에 모심기를 할 때면 왠지 나도 한 몫 거들어야 할 것 같아서 논두렁으로 내달리곤 했단다. 목청 좋은 선소리꾼이 <모심기 노래> 앞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나가는 그 흥겨운 소리의 난장이 어찌나 좋았던지 못줄을 잡은 어린 농사꾼인 나는 속으로 흐뭇해하곤 했단다. 그 동안 도시 생활을 하면서 이런 함께 함의 즐거움을 잃고 살았구나. 사람에게는 홀로 걸어가는 오솔길도 있어야 하지만, 어깨를 겯고 함께 나아가야 하는 광장도 필요하단다.

 

광휘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는 그곳에 머물자고 하지만 주님은 산 아래로 향하셨어. 귀신 들린 아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비근한 일상 속으로 말이야. 거룩함은 통속적인 일상의 한복판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란다. 집의 책장 모서리에 붙여놓았던 '수류화개水流花開'라는 글귀 생각나니?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난다는 뜻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능동적으로 읽고 싶더라. 고인 물은 흐르게 하고, 잠들어 있는 꽃은 피어나게 하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뭔가에 막혔던 생명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게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피어날 줄 몰랐던 사람다움의 꽃이 피어났어. 아직 때가 이르기는 하지만 정진규 시인의 시 한 편이 우련하게 떠오르는구나. 지금 이 땅엔 진달래가 지천이야 죽은 이의 무덤가에도 진달래가 지천이야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왈큰왈큰 알몸 열어 보이고 있어, 무덤도 열고 있어 때가 되니 그냥 그렇게 하고 있어 사람들은 왜 싸워서 자유를 찾나 자유를 가로막나 이 땅의 진달래꽃들은 때가 되니 그냥 그렇게 하잖아 신명나게 그냥 그렇게 하잖아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몸詩·14 부분) 왈큰왈큰 알몸을 열어 보이는 진달래, 무덤까지도 열고 있는 진달래처럼, 울울한 우리 마음도, 우리 역사도 잘 열렸으면 좋겠다. 네가 그 곳에서 희망의 등불 하나를 밝히면 세상은 그만큼은 밝아질 거야. 희망은 힘이 세단다.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고, 정신의 독립군이 되기 위해 늘 깨어있거라. 산에서 만난 애잔잔한 노랑제비꽃이 너의 미소를 닮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