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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17 - 이단자 칼릴

새벽지기1 2021. 7. 14. 06:36

이단자 칼릴

 

어제 집에 잘 들어가셨는지요? 불통의 광장, 숨죽인 흐느낌이 조용히 일렁이는 광장, 차벽으로 둘러싸인 광장 저 너머, 농밀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던 별이 제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왔습니다. 겨우 몇 시간 광장에 머물다가 집에 돌아왔는 데도 몸에 든 한기가 좀처럼 가시지를 않네요. 하지만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니 차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광장에서의 시간을 반추해 봅니다. 낮부터 밤까지 분향소의 조문 행렬이 몇 시간 째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글 '조와弔蛙'가 떠올랐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다 죽은 줄 알았던 개구리가 꼬무락꼬무락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며 선생을 사로잡았던 실낱 같은 희망을 저도 보았습니다. 안으로 잦아드는 듯이 보이던 슬픔과 분노의 강이 1주기를 기해 일시에 밖으로 터져 나온 것 같습니다. 음험한 이들은 어둠 뒤로 몸을 숨기고, 시간이 흐르면 결국 모든 것이 잊혀지고 말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일 뿐입니다. 광장에 나온 이들은 아직은 세월호를 망각의 강으로 떠나 보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광장 곳곳에 세워진 희생자들의 유품 사진, 생기있고 발랄한 모습으로 찍은 단원고 학생들의 단체 사진, 그리고 희생자들이 부모님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문구를 찬찬히 둘러보는 시민들의 모습은 마치 가슴에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새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읽어야 할 책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서가에서 빼든 책은 칼릴 지브란의 <반항하는 정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시민들의 행렬에 동참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족하고 있는 많은 교회의 현실이 아프게 떠올랐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위험하고 혁명적이며, 젊은이들에게 반항정신을 고취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압수되어 베이루트 광장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칼릴 지브란은 자기가 속해 있던 교회로부터 파문 당하고, 국외로 추방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위험한 책이지요. 저는 그 가운데 나오는 '이단자 칼릴'을 마치 의례를 거행하듯 찬찬히 읽었습니다. 

 

쉐이크 압바스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마을의 족장입니다. 착취와 억압이 일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권위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눈보라가 몹시 치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살던 가난한 모녀 레이첼과 미리암은 살려달라는 누군가의 부르짖음을 듣고 밖으로 나갑니다. 모녀는 눈구덩이 속에 마치 검은 헝겁처럼 쓰러져 있던 젊은이를 찾아냈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정성껏 돌보아 줍니다. 그 젊은이는 수도원에서 쫓겨난 칼릴이라는 수도사였습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수도원에 보내져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천덕꾸러기로 살던 그는 그런 수모의 경험을 통해 수도원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칼릴은 자기가 쫓겨나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힙니다. 그의 영혼이 하늘의 진리에 취했던 어느 날 그는 수도사들 앞에서 그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길기는 하지만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 교계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찌해서 당신들은 여기 수도원에 편히 앉아 가난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빵을 먹으면서,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과는 동떨어져서,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는커녕 고지식한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들 보고 이리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어진 목자들이 되라 하셨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떼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토록 헌신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맹세하고 또 서약하고서도, 당신들이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린 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종교가 뜻하는 모든 것을 다 저버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겉으로는 당신들의 육신을 죽이는 체하나, 속으로는 당신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질색인 양하면서도 속마음은 탐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백성의 지도자요, 스승이라 자처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들은 강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수도원의 넓디넓은 땅일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금과 은도 다 되돌려 줍시다. 사람들을 섬기는 하느님의 종이라고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준 약한 자들을 말 대신 행동으로 섬깁시다. 그리하여 불행한 역사에 시달려 온 이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환하게 미소짓고, 하늘의 은혜와 생명의 영광 속에서 자유의 숨을 쉬게 합시다. 

  못난 백성들의 눈물은 잘난 당신들의 거드름피우는 웃음보다 더 아름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저들의 소박한 마음씨는 이 수도원 곳곳에 세워지고 걸려 있는 우상들보다 더 거룩하며, 걸인이나 창녀를 측은히 여기고 동정하는 저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은 우리가 매일같이 빈 말로 허공에다 뇌이는 긴 기도문보다 더 숭고한 것입니다."(칼릴 지브란, <반항하는 정신>, 당그래, p.22-24)

 

마치 미가나 에스겔의 예언을 듣는 듯하지 않습니까? 칼릴은 수도사들에 의해 '이단자'로 규정됩니다. 이단자라는 말은 이처럼 우리들의 혼곤한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이들에게 덮씌워지곤 하는 멍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좌파'라는 말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칼릴은 매를 많이 맞았고, 40일 동안 수도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추방당했습니다. 그것도 눈보라가 혹독하게 몰아치는 날에. 더 이상 수도원에 '반항의 병균'을 옮기지 못하도록. 칼릴은 자신이 수도원에서 받은 박해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 나라 백성이 받는 수난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열 여덟 살 소녀 미리암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칼릴을 격려합니다. "눈보라는 꽃을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꽃씨들까지 멸할 수는 없어요. 도리어 눈은 꽃씨들을 강추위로부터 따뜻하게 보호해 주지요."

 

이야기는 매우 희망적으로 끝납니다. 수도원에서 추방당한 자가 레이첼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쉐이크 압바스에게 들어갔고, 압바스는 무뢰배 세 명을 보내 칼릴을 체포합니다. 칼릴에 대한 소문이 이미 작은 마을에 퍼졌던 터라, 사람들은 모두 뛰쳐나와 쉐이크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노기 띤 쉐이크 앞에서도 칼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땅의 주인인 민중들에게 굴종을 강요하고 있는 그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 쉐이크 편에 서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신부를 보면서 "저 사람한테 팔리기 위해 계시는 하느님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고 저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부르댑니다. 칼릴의 말은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자유혼을 깨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유의 하늘을 훨훨 날아 오르라고 신이 내려주신 영혼의 날개를 떼어 버리고 벌레처럼 땅을 기며 수모를 자초하는 피동적 군중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지배자들의 위협적인 말이나 몸짓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한 주체로 일어섰습니다. 피지배자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지배자들의 허위의 의상이 벗겨지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 척박한 광야에 선 자유인이 되기 보다는 들큼하고 안온한 행복을 위해 자기 자유를 기꺼이 유보합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있다면 사람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 아닐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뜩이나 삶이 힘겨워 비틀거리는 터에 확실한 답을 제시하기는커녕 불확실함을 부둥켜 안으라는 말이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는 삶은 벼릿줄이 없는 그물과 같아서 늘 공허만을 수확할 따름입니다.

 

역사가 퇴행하고 있다는 음울한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리에 붙들려 참을 외치는 '칼릴들'입니다. 그리고 그 참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레이첼과 미리암입니다. 홍순관 님은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라고 노래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겨울의 눈보라를 뚫고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야말로 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에게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라는 강고한 절벽을 뚫고 피어난 한 송이 인간의 꽃이었습니다. 그 꽃은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진 제국의 탐욕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열어보이는 창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겨울의 뒤끝이 무작스럽다고는 해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못 말리는 희망입니다. 늘 몸이 굼뜬 사람인데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 주시고, 또 동행으로 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곡우에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 흔흔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