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복음과 유머 / 김북경 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새벽지기1 2020. 12. 26. 09:20

2005년 3월 17일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공주병을 경계하는 말 같기도 하다. 희랍신화의 나르키소스라는 미동은 샘물 가에서 물에 비췬 자기 얼굴에 만취되어 마냥 드려다 보다가 수선화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선화는 고개를 항상 떨구고 있나보다. 수선화의 영어 이름이 나르시서스이고 그래서 공주병을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다. 더 이상 자기만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또 다른 사람을 보며 산다.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
복한가보다.


복음과 율법은 적대 관계가 아니지만 복음과 율법주의는 원수다. 우리는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율법주의는 율법에 얽매어서 율법의 노예로 산다. 율법주의자는 완전주의(Perfectionism)로 연결되며 완전주의자는 자기의 잣대로 남을 비판한다. 그리고 자기가 율법을 어기면 자학하게 되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천주교에서는 절망을 일곱 가지 큰 죄 중에 하나로 꼽는다. 절망은 자포자기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 즉 하나님의 죄사함의 능력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살을 안 한다.

 

완전주의자는 자신뿐 아니라 남도 비판한다

 

자학은 교만에서 비롯된다. 교만은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많은 것이다. 이런 사람이 죄를 지면 자기를 용서 못한다.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자존심이 너무 커서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결과이다.


율법주의자는 기쁨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 지키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를 세워나가는데 바쁘다. 그 뿐 아니라 자기 율법의 잣대로 남도 감시한다. 그 비판의 눈은 항상 번쩍인다. 이런 바리새파 정신은 자기를 죽이고 남도 못살게 한다. 이런 삶은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예수 안에서 쉼이 없는 인생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당신 예수 믿소?”라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이 자신 있게 “아무렴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특히 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기쁨이 없고 복음에 깃들어 있는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처구니없는 인생에 역전을 일으킨다

 

그러나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요. 그저 기적일 뿐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진짜일 가능성이 많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유머를 보았다. 도저히 구제불능의 인생을 역전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사라는 임신시켜 주리라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황당한 구원의 방법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사전에는 “구제불능”이라는 단어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