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3일
배구에 시간차 공격이 있다. 지구지반이나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것도 시간차 예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과 우주로부터 특별한 전자파들에 대한 연구나 가장 먼 우주의 실체에 관한 연구는 이미 오래된 과거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지구에 영향을 준 이후 과거 지구에 대한 증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로부터 발견된 가장 먼 은하계의 광년이 지구의 물질입자들의 나이보다 적을 수 있어도, 우주의 변화로 인한 지구의 멸망은 시간차 예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종말은 도적같이 오지만 각인의 눈이 그 현장을 보도록 오는 신비한 종말(계 1:7)이다.
신비한 우주의 현상계
고고학의 오류들은 근원적으로 인간 뇌현상으로 인한 오류들 이외에 이런 시간 개념에 있어서 오류들이 많다. 그런 시간이나 정보의 개념들을 확대하여 우리 몸이 일반적인 지각들을 통해서 얻는 정보방식 이외에 다른 정보방식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증명된다면, 계시나 꿈과 같은 현상들을 좀 더 과학적으로 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의 지향적 커서는 시각 현상 안에 있는 지향적 커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계속 흐르고 있는 다른 복합계 안에 있는 지향적 커서이다. 즉 가시적 빛들의 제한된 파장들을 분별하여 형성된 화면의 제한된 커서가 아니라 접촉이나 소리파장 등 다른 파장들을 인식하여 그런 시각의 3 차원 이상의 화면과 복합적으로 어울러 하나의 커서가 형성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하는 의식 세계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기 전 혹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정보들이 변환될 때 결합되어 있는 인간의 의식의 삼차원 이상의 시상 화면에는 외부 정보들이 없이도 안구 운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꿈에서도 자아는 꿈을 꾸고 있는 자로 꿈 밖에 있고 그 자아가 꿈 밖에서 꿈의 현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각도들에 따라 안구운동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왜 꿈을 꾸고 어떤 특정한 꿈을 꾸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나 과거, 현재에 관계없는 동시적 파장이 존재하고 그 파장들을 지각하는 능력이 잠재적으로 인간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시각과 전혀 다른 경로로 그 정보들이 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몸에 우리 우주의 경계선 고리로서 역할을 하는 블랙홀 세계를 넘어 그런 세계로부터 오는 정보 통로로 기능하는 영혼과 같은 전혀 다른 독특한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런 가설들은 단순히 상상의 세계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그렇게 자신을 보듯이 우리의 세포들의 활동과 거시세계의 정보들의 유동까지 모든 것을 동시에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렘 20:12; 계 2:23)이 전제되어 있다.
초월 현상 인지하는 기준 필요
중성미자와 같은 검은 물질이나 검은 근원적 에너지가 겨우 5 퍼센트에 불과한 우리 우주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그 물질이나 에너지 개념은 아직도 애매하다. 미래 과학의 발전은 기존의 상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가능하다. 요즘 자라는 세대들의 경우 이런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길이 막혀 있다. 세계 속에 경쟁하기 위해서 이중언어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뇌의 한 곳에 동시에 이중언어능력이 구사되도록 교육받기에 급하고 기업윤리, 테러, 노숙자 문제, 공공정신 등 제반 사회문제들을 푸는 낙오자 없는 교육 단계인 초등학교 4학년 이내 국민교육을 끝내며 이제 대상에 대해 거리를 가지고 깊게 생각하게 하는 인적자원들을 만드는 교육과정에서 전 인구의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된 개인파일들이 만들어져 갈 때에도 물론 거기에 불평등이 있게 마련이다.
세상 교육은 규격화되고 있어
사회 전체의 분위기 안에 상상의 세계의 폭을 넓이고 깊게 하도록 도우는 공간이 있어야 그런 불평등이 조금씩 해소될 수 있다. 아무리 돈을 버는 자원이 된다고 해도 뛰고 웃기고 욕하고 외치고 때리는 것이 전체 사회분위기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감각들이 안식하는 곳은 자연으로 족하고 교회와 같은 공간들은 미래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이 쉬는 곳이어야 한다. 아무리 각박하여도 각 자의 가까운 곳에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쉴 수 있는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
는 창조된 마음이 진정하게 어떻게 쉴 수 있고 안식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쉴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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