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와 예배가 필요합니다. 적당히 예수 믿는 것은 안 됩니다. 이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회개하고 가슴 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영혼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3장에 나오는 지성인에다 권력을 가진 니고데모와는 정반대의 여인을 한 명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허물과 실수로 과거를 점철해온 여자이기 때문에 이름도 여기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예루살렘, 갈릴리, 사마리아를 두루 다니셨는데 이때는 사마리아를 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서로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같이 자리에 앉지도 않는 그런 관계인데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몸으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이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인을 만난 중동의 오후 12시는 태양이 작렬하는, 견디기 힘든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나서야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작렬하는 태양에 몸을 노출시키는 것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나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손가락질을 받고, 수군거림을 당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이 여자는 아무도 없는 대낮에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봤더니 한 남자가 피곤한 몸으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 뜨러 온 여인이 만난 예수는 한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에 불과했습니다. 이 여자는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사람이 그립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데 자기의 슬픈 과거 때문에 피해야만 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댈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자마자 생기가 돌아 “나에게 물 한 그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잘 비교해보십시오. 니고데모의 경우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찾아갔습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영적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십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말을 붙일 수 없는 여자입니다. 가난하고 천대받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떳떳하게 얘기를 못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 사마리아인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부탁했을 것이고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영적인 눈을 뜨다
여기서 여자는 한 남자에 불과했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눈을 뜹니다. 잘 배운 사람만 눈 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많이 배운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난하고 무식하고 아무것도 없어도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란, 영생이란, 거듭남이란 아무리 무식하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리 앞에서 벌거벗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떳떳하게 예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니고데모는 지식인인데도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서 깨닫지 못합니다. 당황해합니다. “아니, 거듭남이라는 게 뭡니까.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그럼 이 나이에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그것도 모르느냐. 바람이 불되 임의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 것처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선문답입니다. 그런데 4장에 와서 소개하는 여자에게는 절대 어려운 말을 안 쓰십니다. 이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수준에 맞는 대답을 하고 그 수준에 맞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수준에 맞게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받고 싶다면 나에게 구하라.” 이 말을 듣고 이 여자는 한 남자에서 한 단계 눈을 더 뜨게 됩니다. 신앙이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가려면 내가 깨져도 12번은 더 깨져야 합니다. 그렇게 눈에 안 보이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술할 때 정말 정교하고 계산적으로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대답을 주십니다. 아주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네가 똑똑하니까 네가 알아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눈을 뜨게 되고 그 눈에 우선 육체적인 희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다고 한다. 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한다”며 놀랍니다.
필요를 아시는 주님
이 여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믿습니다. “제발 내가 여기에 12시에 물 길으러 안 왔으면 좋겠다. 사람 좀 안 만났으면 좋겠다. 인간답게 떳떳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여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렵게 하나님의 아들로 웅장하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수준에 맞게 상처주지 않고 단순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이 여자의 필요를 파악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상대방의 필요를 모르고 내 필요만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얘기는 안 듣고 내 얘기만 계속하니까 하품하고 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왜 우는가, 왜 슬퍼하나, 왜 우울증에 빠졌나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내 이웃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을 천민 취급하고 우습게 보는 한 유대인 남자라는 관점에서부터 이 여자는 눈을 떴습니다. “어, 그게 아닌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신다는데 그렇다면 이 분은 우리의 조상이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야곱의 우물을 만들었던 야곱보다 더 큰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이 여자의 영혼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11~12절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께서는 어디에서 생수를 구한단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까. 야곱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의 아들들과 가축들도 다 여기에서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까?”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0년 넘게 교회 나와봐야 예수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만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뜰 때 자기 인생이 달라지고 생기가 생기고 목적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태도가 달라지고 변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또 설교하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말, 착하게 살아야한다, 거짓말 안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윤리적·도덕적 교훈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자꾸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얘기가 피부로 생생하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을 알면 어떤 고난과 위기가 와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오래 다닌 사람 중에도 예수님을 못 만난 사람은 사업이 망하거나 하면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세상의 고뇌는 다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13~1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육체의 갈망과 영혼의 갈망의 분리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을 먹는 것입니다. 죽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도 외롭지 않습니다. 인생의 최대의 숙제는 외로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 속으로 앓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민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거듭남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안 했던 대답을 이 여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 순간 이 여자는 사물이 정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기가 물 길으러 온 것도, 지금 야곱의 우물 앞에서 어떤 한 남자와 오해 받을 수도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립니다. 이 여자 앞에는 예수님만 보인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 여자가 절규하기 시작합니다. “여인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게 그 물을 주십시오.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다시는 물 길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이 여자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십시오. 다시는 우물물을 뜨러오지 않게, 물을 뜨러와서 수치감과 상처를 다시 확인하지 않게 나에게 그런 물이 있다면 가짜라도 좋으니 주십시오.” 이것이 이 여자의 외침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이 외침이 필요합니다. 이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수치심과 거절감과 사람을 떳떳하게 만나는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곧 육체의 갈망과 영혼의 갈망이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도 깊이 예수에게 못 들어가는 것은 육체의 갈등과 영혼의 갈등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냥 배고픈 사람은 밥 먹고, 목마른 사람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런 육체적인 필요에서부터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서 영혼의 요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과 말 안 하는 사람입니다. 교육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육체의 갈등과 영혼의 갈등이 지금 막 찢어지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해답을 주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다시는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는 그 목마름에서부터 해방되는 길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도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다 쇼입니다. 자기만족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물과 남편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화제를 확 돌리십니다.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말이 옳도다. 너는 원래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 이 남자하고도 살아보고 저 남자하고도 살아봐도 인생에 만족이 없고 속고 늘 매 맞고 쫓겨 다녔다. 그리고 지금 네가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곧 떠날 사람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더 놀랍니다. 예수 믿는 것은 놀람의 연속입니다. “아니, 나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당신은 나를 아십니까. 내가 이렇게 외롭고 고독하고 죽고 싶고 수치스러운 인생을 살았는데 어떻게 당신은 아십니까.”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이제 이 여자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다 눈이 한 번 더 뜨이게 됩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입니까”에서 “당신은 야곱보다 큰 사람입니까”를 거쳐 “당신은 예언자입니까”로 관점이 발전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여인이 하고 있습니까. 계속 이 여인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다라는 말을 안 하십니다. 여자의 영적 성장이 급속도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배하는 자
목마름에서 해방되는 두 번째 길은 예배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이 산도 말고 저 산도 아닌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발견하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쇼가 아닙니다. 화려한 무대장치를 만들어놓고 좋은 노래를 하는 것만으로는 예배가 아닙니다. 메시아를 발견하는 게 예배입니다. 회개를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화장이 다 지워지고 눈물과 콧물을 펑펑 쏟으면서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목사도 아니고 권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닙니다. 예배자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진짜입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꽁꽁 숨겨놓은 자기의 과거를 열어놓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 여자의 생각이 또 바뀝니다. “우리의 희망은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인데 그러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뜻입니까.” 한 남자에서 메시아까지 이 여자의 생각은 점점 변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한 30분 정도입니다.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해도 예수님을 못 만날 수 있고, 30분 안이라도 메시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필요합니다. 이 샘물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예배가 필요합니다. 우리교회의 불행은 눈물 흘리는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는 겁니다. 프로그램과 형식으로 우리가 예배드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깊이 빠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다. 내가 메시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누리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예배도 좋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예수 믿는 것은 안 됩니다. 이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회개하고 가슴 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영혼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도들이 수가성의 불쌍한 여인처럼
예수 만나 춤추고 기뻐하고 소리 지르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는
그런 감동적인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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