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절박한 상황에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용납하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요한복음 7장 말씀과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빛을 발견할 것이라는 요한복음 8장 말씀 사이에 오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평하지 않는 삶
1절입니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올리브 산에 왜 가셨습니까. 7장 53절에 보면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가지 않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으셨습니다. 큰집을 가지고도 한 사람 살리지 못하는 인생이 있는가하면 작은집을 가지고서도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도, 머물 곳도 없이 살아가셨지만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감람산에 가서 불편한 잠을 주무시고 밤새도록 기도하셨지만 그분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내가 처한 위치와 형편에 관계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란 더 큰 공간, 더 좋은 형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 빛을 찾아주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처한 형편과 상황 때문에 불평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고 쉬신 예수님은 다음 날 아침 어디로 가십니까. 2절입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 이 말씀에는 ‘다시 성전으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기도하고 감람산에서 쉬신 뒤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7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성전에 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보통사람이면 자기를 체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성전으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성전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가슴 아픈 한 여인, 죽을 지경에 처한 한 여인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성전으로 다시 가시는 것입니다.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문의 형편이 좋지 않아도 회사 형편이 좋지 않아도 그곳에 당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만날 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보내시는 이유
5절입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분명 죄를 지은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죽을 지경에 처해 끌려온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여자는 돌아 맞아 죽어야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생각을 묻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들어 죽이라고 말하면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로마법에 간음은 사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을 들지 말라고 말하면 신명기 22장 22절에 ‘간음한 여인은 죽이라’고 되어 있는 모세의 율법을 여기는 율법파기자가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곤란한 상태입니다. 6~7절입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구부린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예수님은 율법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죄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돌을 들고 있지만 너희 역시 죄인이며 너희 역시 돌에 맞아 죽어야할 위치다. 돌을 들 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이 이 자리에 잡혀왔는데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돌을 듭니까. 비판의 돌을 들고, 정죄의 돌을 들고, 비난의 돌을 들었습니다. 간음죄를 지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여인을 죽어도 괜찮은 한 사람으로 봤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목적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절대로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보십니다.
당신을 목적으로 보시는 주님
10절입니다.“예수께서 일어나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 떠나가고 여인과 예수님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서 있던 여인과 예수님이 일대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경험이 중요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경험과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이 단독자의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경험을 해야 진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경험, 두렵고 떨리는 경험, 죽을 수밖에 없는데 용서받는 이 경험,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도저히 세상과는 다른 그 경험, 나를 향해 세상은 비난하고 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그냥 안아주시며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십자가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날마다 없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포하고 축복합니다. 절망하고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품어주고 안아주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이 사랑의 경험이 오늘 당신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단독자로 선 여인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네가 죄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다시 죄를 짓지 말라. 다시 기회를 주겠다. 희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다시 시작을 주십니다. 죄를 지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홍수가 났는데 하나님은 방주를 주시고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
여러분, 여인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죄 짓지 않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시간을 사용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여러분, 몰래 죄 지으면 당신의 영성이 떨어집니다. 명예도 떨어집니다. 몰래 죄 짓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이렇게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돌을 들지 않은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리라. 돈도 그렇게 사용하고 시간도 그렇게 사용하며 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은 당신에게 돌을 들지 않습니다. 고소하지도 않고 정죄하지도 않고 시험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피를 흘려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절박한 상황에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용납하신 주님께서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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