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실로암의 기적 (요한복음 9:1~12)

새벽지기1 2020. 4. 15. 07:25


고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찬양하면서 고난을 해석하고,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볼 때 희망이 있습니다.생각의 변화, 인생의 목적에 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우리는 지금 인물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 만난 사람들’이 이번 시리즈 설교의 주제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인생이 변하고, 철학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절망했던 사람이 희망을 얻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덟 명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소개한 세례 요한과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소개됩니다. 2장에서는 결혼식장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최초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물 떠온 하인들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3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훌륭한 지성인이었으며, 권력과 정치의 모든 것을 한 손에 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4장으로 넘어가면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우물가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가성의 이 여인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간에 예수를 만납니다. 5장에서는 38년 동안 걷지 못하던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를 만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걷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6장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장면을 목격했던 군중들과 폭풍우가 치는 날 배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이 나옵니다. 7장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생명의 떡과 물을 전하십니다. 지난주에 설교한 8장에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 이 여자를 구해주십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나타나는 허점


오늘 본문에서는 아홉 번째 인물이 소개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질문 자체가 굉장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입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우리는 먼저 제자들의 질문에 세 가지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첫 번째, 이 질문은 누구도 대답을 시원하게 할 수 없는 인생의 부조리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무신론자들이 이 질문에 넘어집니다. 아프리카 전쟁 난민 어린이들, 어른들에게 전염되어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 무차별 연쇄 살인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가난의 대물림, 짐승처럼 살고 이유 없이 살해 되는 모습들, 이것 자체가 인생의 부조리가 아닙니까?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의 생애를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 가난, 살인, 폭력 등은 깊이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고 외롭고 무의미할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질문에 부딪치게 되면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나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왜 나는 버림을 받았을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나?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노합니다.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오류


두 번째, 제자들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이 질문을 던졌지만 제자들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제3자입니다. 막상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별로 안 합니다. 먹고살기 바빠서, 너무 인생이 고통스러워서 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을 붙잡고 싶어합니다. 작은 선물에, 물 한 모금에 감사합니다. 밥 한 끼에 정말로 행복해합니다. 그들은 삶에 대한 거룩한 의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3자의 입장에 있는 제자들은 말투가 비꼬여 있고, 흥분하고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당사자들을 이용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세 번째, 제자들의 질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허점은 ‘부모의 죄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라는 질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선입관으로부터 나온 질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할 때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거나 선입관 때문에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눈먼 것이 부모의 죄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정보입니다. 오산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20장과 34장, 민수기 14장을 보면 부모의 죄가 3, 4대까지 전승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질문은 이 말씀을 확대해 재해석한 것입니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그 자녀들은 다 죽거나 병든다는 말일까요? 만약 그렇게 됐다면 인류 역사에서 존재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것이 어느 부분에서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녀는 천 대 아니 수천 대에 이른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빼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병은 죄로부터 온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이 질문을 합리화시킬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 질문을 갖다 댑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아이가 눈멀었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부조리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눈먼 사람의 병이 본인의 죄입니까?’라는 질문도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죄를 지어서 그 심판으로 벌을 받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대로 병든다면 여기 앉아 있을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입니다. 귀신이 들어와서 병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힌 종교지식, 잘못된 지식 때문에 생긴 오류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지식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세상은 부조리한 것이다’고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고난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부모의 죄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면 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냐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 아주 확실한 대답을 해주십니다. 9장 3절입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는 병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죄 때문에 모든 병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3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일본으로 선교하러 갔던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참수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간호사인 그 선교사님의 딸은 하나님을 향해 막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러 간 분을 어떻게 참수를 시킵니까?’라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신앙에 회의가 생겨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나’라는 질문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 간호사는 전쟁 후에 부상을 당한 일본 포로들을 찾아가서 돌보고 전도를 하다가 다시 일본 선교사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고통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고통을 잘 해석하면 헬렌켈러 같은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면 하늘을 원망하고 불평만 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똑같은 고난인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인생의 불행과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면서 그 고난을 해석하고, 고난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날아가는 것입니다. 왜 나만 불행합니까? 왜 나만 억울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축복


불행한 일이라 할지라도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일 수 있고, 반대로 행복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주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내게 찾아온 사건이 하나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볼 때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애에 어떤 환난과 고난, 어떤 부조리와 억울함이 있어도 하나님이라는 안경을 쓰면 축복이 됩니다. 은혜가 됩니다. 감사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살아납니다. 그 생각을 안 하고, 믿음이 없으면 계속 또 아프고, 또 실패하고, 또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억울하고 분한 것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 순간부터 건강해지고 긍정적이 되고, 그 순간부터 누구를 미워하지 않게 되고, 핑계를 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이 시간에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해석이 안 되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눈이 멀었어도, 귀가 안 들려도, 말을 못 해도, 암을 가지고 있어도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주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도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증거하겠습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이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 인생의 목적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일어나는 ‘기적’ “우리는 낮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4~5절) 고난을 겪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해 못하는 일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면 이것이 지금은 해석이 안 되더라도 천국가면 다 해석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해석이 될 것이고, 말씀이 임하면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낮입니다. 밤이 되면 일을 못 합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끝나면 일을 못 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때가 낮에 일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밤이 되면 일을 못 합니다. 여러분 인기 있을 때 그 인기를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더 이상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현실을 인정하고 감사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눈먼 사람은 어떻게 눈을 떴고, 눈 뜨고 난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6~7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그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가서 씻고는 앞을 보게 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더니 눈을 뜬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문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막대기 위에 놋뱀을 걸어놓고 그것을 보면 뱀에 물린 사람이 살아나고 안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이해되십니까? 신앙에는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성으로만 보면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보다 더 위대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남자는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눈을 뜬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구걸하던 것을 보아온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습니다. 9절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 사람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그냥 닮았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1~12절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고 하셨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볼 수 있게 됐소.’ 사람들이 ‘예수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는 ‘모르겠소’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남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눈을 떴소. 평생 못 보던 눈을 떴소. 나는 예수가 눈을 뜨게 해준 것을 믿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선포이고 전도입니다. 이제 인생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부터 내 인생을 바꾸어주시고,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