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생각이 들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이 생기고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같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변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소개했던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평생 같이 일할 일꾼들을 선택합니다. 안드레, 시몬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등 제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나의 기적의 중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또한 저주 받은 성인 사마리아의 수가성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사람을 등지고 살아가는 한 여인을 예수님이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오늘 본문에 38년 된 앉은뱅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공통된 특징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환경에 따라 인생을 살아갑니다. 부모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로도 살 수 있고 부모 밑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지만 예수라는 분을 만나서 인생의 대전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변화되는 인생
요한복음 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의 절기가 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양의 문’ 근처에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위에는 다섯 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 환자들 등 많은 장애인들이 누워 있곤 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여기서 먼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십자가에 돌아가기 전까지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 시기를 가리지 않고 몸이 지치도록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목적을 한 번도 바꿔 본 일이 없고 곁눈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곁눈질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기 부인이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 곁눈질하고, 내 회사가 있는데도 다른 회사를 곁눈질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절이 되건 또 무슨 일이 생기건 상관없이 한 목적, 한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에 집중했다는 것이 오늘 말씀에서 보이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
오늘 예수님이 가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 가든 갈릴리로 가든 사마리아로 가든 어디를 가든 예수님은 환경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장사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 환경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증축할 때도 이 양의 문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양의 문은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큽니다. 그냥 문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는 집이 그냥 집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의미가 있는, 영적인 사건이 만들어지는 집이 여러분의 집이고 직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양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셨는데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길이다.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니고 길 중의 길이다.” 사람들은 꼭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고 묻습니다.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 불교도 힌두교도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만이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독선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처럼 들립니다. “아침에 도를 깨닫고 저녁에 죽으면 한이 없느니라. 나는 열방을 가리키는 소리다”라고 말해야 멋도 있고 독선적으로 보이지 않을 텐데 예수님은 자신이 길일뿐만 아니라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려면 갈등을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베데스다에 모인 현대인 예수님이 들어가신 양의 문은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로 긍휼, 자비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앞에 연못이 있었고 기둥 5개가 있었습니다. 그 베데스다라는 못에 많은 병자들이 모였습니다. 성경은 행각에 모인 사람들의 병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병들은 한결같이 난치병들이고 불치병들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큰 병원의 응급실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입원하기 어려우니까 모두 들것을 가지고 응급실에 들어가서 땅바닥에 누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입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치열했을지도 모릅니다. 냄새나고 더럽고 웅성거리고 큰 소리가 나곤 했을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게 뭘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돈을 많이 벌 것이다. 건강해질 것이다. 사업이 잘 될 것이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희망이라는 것에 속으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오면 물이 솟구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은 긍휼과 자비를 기다리는,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둥이 5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이 몰려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5개의 기둥은 모세 5경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베데스다는 고침을 못 받았지만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여 있는, 목마른 구약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메시지가 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목마르고 갈등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100세가 되어 가는 한 장로님 한 분이 있는데 이 분은 많은 병으로 수술도 많이 해 이제는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다리를 저십니다. 나를 만나면 언제나 “저는 장애인입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장애가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장애든 코가 장애든 장기가 장애든 다 하나씩 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건강을 자랑하고 젊음을 자랑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인생의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천사가 내려왔는지, 진짜 병이 나은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전설에 희망을 걸고 사실이 아닌 것에 희망을 걸고 사는 모습이 우리와 비슷합니다. 저는 이것을 보다가 로또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로또 하나 당선되기를 기다리며 매일 월급 쪼개고 지갑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로또가 당선이 되어서 이렇게 힘든 내 인생이 한 번 변했으면 좋겠다’는 심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를 지나가시면서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마침 그 연못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많은 병자들이 있지만 조금 불공평하게도 딱 한 사람에게 눈길을 준 겁니다. 5장 5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이 좀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본문입니다. 다 똑같이 힘들어하는데 예수님은 왜 한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을까요. 인생을 살아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매사가 부정적이고 외롭고 소외됐다고 생각하고, 자기만이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나그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사고방식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를 생각하면 불행합니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순서에서 빠졌다”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아무리 배고프고 어렵고 힘들도 셋방살이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믿음
얼마 전 한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한 여자가 남편은 도망 가버리고 4명의 애들을 데라고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 여자의 직업은 자동차에 광고지를 꽂는 겁니다. 하루 종일 꽂아야 2만 원을 법니다. 애들이 학교에서 올 시간에 나가지도 못하고 일을 합니다. 이 엄마의 인생은 달리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무튼 걸어 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계속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 몇 푼 더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밥 먹고 반찬은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사채업자가 나타나 결국 집도 차압을 당했습니다. 이 여자가 너무 힘들어서 방 한 구석에서 울고 있으면 아이들이 와서 “엄마 울지 마. 울지 마”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셨다. 나는 존귀하고 보배로운 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8년 된 병자는 무슨 특별한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예수님은 이 남자를 택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내가 선택 받은 자인가, 은혜 받은 자인가, 축복 받은 자인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 마음대로 잘 안 됩니다. 작은 일에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큰일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행복해. 참 감사해.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 나는 여기서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난다”라고 생각하면서 고난과 불치병에 맞부딪혀 사는 것입니다. 나는 아픈 지 벌써 30년이 되었고 암수술을 7번 하고 투석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긍정적인 믿음을 안 줬으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요하게 병이 나를 물고 있어도 나는 마귀에게 안 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또 일어나고 또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 나서도 아니고 믿음이 특별히 많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내게 주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이미 오랫동안 앓아 온 것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38년 동안 얼마나 아팠는지, 죽을병에 걸렸는지, 몇 년을 살 건지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이 남자의 병이 오래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던진 첫마디는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남자에게서 긍정적인 생각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환경을 찾지 않고 믿음의 씨앗을 찾습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이 있는지를 보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냥 병 고쳐주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이 기적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믿음에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기적은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가 노력한다고,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됩니까.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묻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아멘 하십시오. 낫고 싶습니다. 되고 싶습니다. 나는 목마릅니다. 열정적으로 희망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십시오. 그런데 죄송하게도 이 38년 된 병자는 그 말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변명을 했습니다. 5절입니다. 믿음의 씨앗 환자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 못에 들어가도록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갑니다.’” 이 남자는 ‘아멘’ 대답을 안 하고 변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어도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일 좋은 것은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말, 희망적인 생각을 계속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건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특별하게 고쳐주십니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도와주십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안 믿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의 문제입니다. 안 믿는 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데도 ‘나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재수가 없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 내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어디 있냐’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생각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설가 임옥인입니다. 이 분은 프랑스에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희망은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글을 쓰며 살고 싶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신애 권사를 불러 “나의 병을 고쳐봐라”고 했습니다. 현 권사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옥인아, 일어나”라고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사도행전에도 앉은뱅이가 일어나는데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어 일어났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난 손으로 ‘새 손’이라는 시를 하나 썼는데 그게 내가 연예인교회를 시작할 때 써 준 축복의 시입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생각이 들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이 생기고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같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희망찬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이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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