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주님의 긍휼(Compassion)

새벽지기1 2020. 1. 12. 06:24


주님의 긍휼


우리가 흔히 passion이라 함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 고 정의한다.

열정은 본능, 감정, 이성, 지성, 의지를 행동으로 결집시키는 것이다.


“열정은 사람에게 꿈을 꾸게 한다. 계획을 세우게 만든다. 이루어내게 도와준다.

열정 없이는 아무리 위한 비전, 거한 꿈도 이루어낼 수 없다.

혼의 불꽃처럼 안에서 타오르는 에너지, 그 무한의 힘이 열정이다.

열정의 가장 무서운 적은 태만과 자포자기다.”


그러나 열정이라는 뜻인 ‘passion’의 원래 의미가 ‘아픔’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통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녀 간의 그 어떤 위한 전설 같은 사랑도 이미 고통을 잉태한 사랑이며,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다.

열정(Passion)은 그것을 넘어 아픔과 고난(수난)을 동반한다.


이에 한 김난도의 해석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열망에는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이란 눈앞에 당장 보이는 달콤함을 미래의 꿈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데서 온다.”


그렇다. 실제로 우리 인생에선 열망이나 열정이 곧 고통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많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든 열정은 그저 해로울 때도 있고, 어리석음의 온갖 무게가 짓누르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열정들이 정신과 결합하여 적 결실을 맺는 시기가 찾아 올 것이다.
열정은 노력이 싸이고 싸여 피어나는 한 떨기 화사한 꽃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열정에서 동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동정(sympathy)이나 연민(pity)과 같은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성숙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passion이란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말할 때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열정에 따르는 아픔과 수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정점에 이른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수난(passion)은 육체적 고통과 희생으로만 그치거나 머무르지 않는다.
Passion + Compassion이란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 com을 넣으면 compassion이 된다.
com은 함께(Together)라는 의미를 갖는다.

다른 사람의 고통(passion)을 자신도 함께(com) 느껴,

그 고통을 미리 덜어주려고 애쓰는 행동이나 마음을 일컫는 단어다.

이 말은 아랍어로 ‘라흐민(rahmin)’이라고 하는데,

‘어머니의 자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헴(rehem)’과 어원이 같다.

라흐민은 어머니와 자녀의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 인간과 인간관계의 원형을 의미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원초적 관계처럼 사심 없이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을 ‘compassion’으로 보는 이유다.


compassion의 의미는 역시 예수님의 성품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이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애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일생을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단어가 바로 이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 Compassion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자, 인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언약을 지키시는 성실하시고 자비하신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내팽개쳐져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마9:36).

그냥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강한 충동 내지는 열정(Passion)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는 이런 능동적인 사역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생을 살며 끊임없이 인간들은 서로의 불의와 불성실을 경험하며 상처를 받고 산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성실함으로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주께 불성실할 때라도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며 기다려 주시는 것은

그가 약속한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인자하심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수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
음이 들어”(14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이런 표현의 원어의 뜻이 바로 창자가 끊어 지는듯한 아픔을 느끼는
사랑이다.


“비록 우리 주님의 수난(Passion)은 끝났지만

주님의 긍휼(Compassion)은 끝나지 않았다.” (William P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