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예수님의 수난

새벽지기1 2020. 1. 11. 06:40


예수님의 수난


4월 이맘때쯤이면 해마다

멜 깁슨의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조명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이 영화가 매우 불편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 영화는 일부 언론에서 사실적인 묘사를 두고 참혹하고 폭력적인 화라고 평하리만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

예수의 고통이 잔인하게 묘사돼 영화 영상을 두고 찬반 논란을 증폭시켰던 화다.


내가 생각해낸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의 육체적 고난에 대한 회화적 표현은 지나칠 정도로 우려스러웠다.

사순절 기간이 돌아오면 어떤 이들은 예수의 고난을

자기의 육체적 고통으로 느끼기 위한 퍼포먼스를 행한다.


러나 이런 일들은 결코 건강하지 못한 왜곡된 신앙의 모습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수도 없다.

그분의 고난이 육체적으로 너무도 무겁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라기보다는

그분의 고난은 그분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대속적인 희생의 공로는 무한하고,

그분의 완전한 순종에는 아무 것도 추가될 수 없다.

예수님의 공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의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인간의 시각을 통해 그 심성을 자극하거나 호소함으로써

제작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시각적 영상은 성경기록의 제한된 영역에서 벗어난
작가의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 역이 될 때,

더구나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며 연기하는 배우들이 복음과 무관한 사람들일 때,

성경말씀과 성령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형성되는 신앙적 지식이나 감성은 항상 위험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기독교 문화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효과적으로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없다.

정통적인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떠한 것도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직 말씀’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각색하여 화화한다는 것,

또한 최소한의 픽션에 따르는 부작용들도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더 깊은 안목과 적 통찰력으로 건강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위 기독교인들에게 감격을 끼친다는 명분 속에 영리를 추구하는 종교 영화가

도리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자각해야 할 것이라는

이 노파심이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예수님의 수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주 전체를 놀라게 할 만큼 가장 크게 울려 퍼진 위한 승리의 함성인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인류와 우주의 구속을 위한 마지막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