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악인의 파멸과 의인의 구원

새벽지기1 2019. 2. 14. 07:34


우리나라 옛말 가운데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선은 권장하고 악은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대개 권선징악 소설과 드라마가 많습니다. 선한 사람이 처음에는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흥하다가 나중에는 악인이 망하고 선인이 승리한다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악인에게는 동일하게 보복을 합니다. 징계를 합니다. 선에 대해서는 좀 다릅니다. 선을 권면하는 동기, 배후에는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윤리와 도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깊이 들어가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습니다. 에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입니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선을 행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용서받을 때입니다. 사랑받을 때입니다. 가치 없는 자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 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죄에는 들킨 죄가 있고 안 들킨 죄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죄를 안 들키는 기술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죄는 짓되 안 들키게 지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죄책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시온을 괴롭히고 짓이기고 수십 년 동안 폭력을 행사했던 나라가 있었는데 에돔이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에돔의 수도가 보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에돔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이사야 63장의 내용입니다. 자격 없는 시온, 가치 없는 시온, 용서 받을 수 없는 시온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로 시온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시온의 구원은 에돔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에돔이 멸망해야 시온이 구원을 받습니다. 63장 1절입니다.“에돔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주홍빛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광채로 옷을 입고 그 큰 힘으로 터벅터벅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정의를 말하며 구원할 만한 힘을 가진 자다.”” 여기서 질문하는 사람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시온을 괴롭히는 이 에돔 땅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세히 보면 주홍빛 옷을 입고 걸어오고 계십니다. 더 자세히 보니 에돔의 수도인 보스라에서 걸어오는 것입니다. 광채로 옷을 입고 용맹스럽게 터벅터벅 걸어오십니다. 예언자가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에돔에서 온 사람은 누구냐?’ ‘에돔의 수도에서 주홍빛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누구냐?’ ‘광채 나는 옷을 입고 큰 능력으로 걷는 분은 누구냐?’고 질문합니다. 바로 그 분은 에돔을 심판하고 보스라를 짓이기셨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정의를 말하며 구원할 만한 힘을 가진 자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이란 정의를 말합니다.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심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칼날을 들고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곤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진짜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말합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예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포도 알을 짓이기시듯이 에돔을 짓이기고 보스라를 짓이겨서 원수를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포도를 발로 짓밟을 때 즙이 터져 나오는데 이때 입고 있던 옷이 빨갛게 물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에돔에서 나오실 때 붉은 옷을 입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보스라에서 나오실 때 큰 능력으로 걷고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복수는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복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런 세상을 살고 떠나야 합니다. 내가 살아온 만큼 내가 행동한 만큼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은 죽기 전에 회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숨겨온 과거를 그냥 숨겨놓고 떠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할 길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원수 갚지 말라고 하셨는데 심판은 다릅니다. 악에 대한 심판, 정의에 대한 심판을 성경에서 복수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사랑은 해야 하지만 원수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2~3절입니다. “왜 그대의 옷이 포도주 틀을 밟는 사람의 옷처럼 붉게 물이 들었습니까? “나는 혼자서 포도주 틀을 밟았다. 백성 가운데 아무도 나와 함께한 사람이 없다. 내가 노여워서 그들을 내리밟았고 분이 나서 그들을 짓밟았다. 그러자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 옷이 온통 피로 더러워진 것이다.””  직접 도와주시는 하나님 심판의 특징은 정의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복수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의 결과로서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이 심판은 사람이 끼어들지 못합니다. 어떤 국가가 와서 심판을 해주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심판은 하나님만이 단독으로 하십니다.


4~6절입니다. “보복할 날이 됐고 구원할 해가 이르렀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나를 격려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그래서 내가 손수 내 팔로 구원했고 내 분노에만 의지했다. 내가 화가 나서 민족들을 짓밟았고 내가 분이 나서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피를 땅에 쏟아 냈다.” 여기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이 심판을 외롭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시온이 외롭게 에돔에게 환란을 당할 때 시온을 도와줄 분, 복수를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 외에도 나를 도와줄 대상이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어려우면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난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의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시온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70년의 포로생활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질적인 도움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에돔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셨지만 그것은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하나님께서 시온에게 행하신 것은 첫 번째 조건 없는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뭔가를 잘했다든지 회개를 했다든지 선을 행했다든지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잘해야만, 주일날  헌금하고 남을 도와줘야만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것마다 배신이고, 실수고, 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시온에게 행하신 것은 무조건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시온에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사랑을 떠올려 말하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로 여호와를 찬양하겠다. 그분이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많은 선한 일은 그분의 크신 은혜와 풍성한 사랑으로 하신 일이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다보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 일을 해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제 변할까요. 돈 많이 주면 변할까요. 야단치면 변할까요. 혼을 내면 사람이 변할까요. 혼을 내면 움츠러들고 방어하지 변하지 않습니다. 더 안 변합니다. 상처만 받습니다. 교육하면 변할까요. 아무리 가르쳐도 변하지 않습니다. 노력하면 변할까요. 안 변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면 변합니다. 용서하면 변합니다. 가치 없는 자를 받아주면 변합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변한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예수 앞에 와서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했더니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갔습니다.(요 8:7)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그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요 8:10) 야단치고 도덕적으로 설교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를 위협하던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였던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요 8:11) 이 여자는 떠나면서 ‘저 남자는 누굴까, 저분은 누굴까’하고 생각하며 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헤어진 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녀는 눈물과 감사로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해야 사람이 변합니다. 용서해야 변합니다. 따지면 변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야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이 시온을 향한 하나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시온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크신 은혜와 풍성한 사랑에 이스라엘은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보다 여러분의 죄가 더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직접 고난에 동참해주시는 하나님 8절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내 백성이며 나를 속이는 자녀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하나님께서 시온에게 ‘너는 내 가족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속이는 자가 아니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의미는 ‘내가 너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매번 배신인데 하나님은 매번 믿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또 ‘내가 너의 구원자가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에게 향하신 일을 9절에서 보겠습니다. “그들 모두가 고난을 받을 때 그분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다. 천사를 보내 구하시지 않고 그분이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그들을 구하신 것이다. 긴긴 세월 동안 언제나 그들을 높이 드시고 안아 주셨다.” 하나님께서 고난에 동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말로만 하시지 않고 진짜 고난에 동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보다 몸으로 사랑하는 것은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은 고난에 동참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지 않고 친히 그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념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긍휼로 사랑하셨고, 하루 이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긴긴 세월 동안 우리를 고쳐주시고 안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 


10~11절입니다.“그러나 그들이 반역하고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원수가 되셔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다. 그러다가 그들은 오래전 모세의 시절을 떠올렸다. 양 떼를 거느리던 목자를 바다에서 이끌어 올리신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그들 가운데 그분의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걷다가 두 가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첫째는 홍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도 뒤로도 땅 속으로도 하늘 위로도 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인 홍해 앞에 섰을 때, 여차하면 애굽 군대가 찾아오고 앞에는 강이 있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에 길을 내시고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막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을 보내준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를 아실 것입니다. 탕자가 어떻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오랜 기다림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용서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라는 생각이 나를 회개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 앞에 가면 내가 살겠지. 나를 용서해주겠지. 저 사람은 나를 기다려 주겠지’ 그 생각을 하는 그 순간에 변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말이 들판을 내달리듯 그들을 이끌어 비틀거리지 않고 깊은 바다를 걸어가게 하신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14절입니다. “평원으로 내려가는 소 떼처럼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쉬게 하셨다. 주께서 이렇게 주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그 이름을 스스로 영광스럽게 하셨다.”시편 23편이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평원을 내려가는 소 떼처럼’을 상상해보십시오. 잔잔한 시냇가와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축복하십니다.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의 잔을 높이 들게 만들어 주십니다. 안심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부딪히는 사건마다 미리 길을 예비하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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