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세상을 이끌어가는 주역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능력이고, 일점일획도 어긋남 없이 세상에서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친히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오셔서 영원 무궁히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단지 존재의 근원이거나, 단지 부동의 동자(자신은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존재라는 뜻)이거나, 단지 선악을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자가 아니고, 세상을 향해 계신 분이요 세상을 위해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한 마디로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 옳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세상 위에 계시지만, 세상 위에 계신 그분은 세상을 향해 계시고, 세상을 위해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시110:10, 잠9:10).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17:3). 하나님을 아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생명이 없다. 그러니 여호와를 알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전12:13).
옳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아니, 이것은 단지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자 진실입니다. 태양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듯이, 지구 위에 70억 인간이 살고 있는 게 사실이듯이, 하나님이 세상 위에 계시면서 세상을 향해 계시고, 세상을 위해 계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세상을 이끌어가는 주역인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는 능력인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돈이 힘입니다. 돈이 자유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돈지갑을 열면 사람이 꼬입니다. 예, 돈이 자유이고, 돈이 힘입니다. 하나님은 현실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비해 돈은 거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돈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기보다는 돈을 알기에 힘씁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고 외치지만 마음으로는 대부분 돈을 더 사랑하고 경외합니다. 정말이에요. 돈이 자유이고 돈이 힘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근원 진실은 아닙니다. 진짜로 삶의 모든 걸 좌우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진짜 주역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는 진짜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자유이고, 하나님이 진짜 힘이고, 하나님이 진짜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삶의 모든 걸 좌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의 성격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것도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부분적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전체적으로 달라집니다. 세계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지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목적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삶의 색깔, 삶의 내용, 삶을 살아가는 태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 등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 삶의 모든 걸 좌우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돈이 많으냐 적으냐도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합니다만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돈이 미치는 영향보다 훨씬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만큼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성경이 쉼 없이 하나님을 알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하나님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본인 스스로도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는 드물고,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 애쓰는 자도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목회자는 교회 성장과 목회 방법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들도 신앙생활 잘 해서 복 받는 것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도 대부분 하나님에게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에만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천박하고 유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고 유치하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어요. 심지어 심각하게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죽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해도 병이 든 것은 사실이며, 그것도 심각하게 병들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너무도 자주 잘못 사용되고 오용되어 왔기 때문이다.”(에버하르트 부쉬. 위대한 열정. 116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너무도 자주 잘못 사용되어 왔습니다. 수많은 설교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따져보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경우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이해 속에는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이 말하는 신 이해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부동의 동자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선악을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권선징악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마음에 들면 복을 주고 하나님 마음에 안 들면 저주를 퍼붓는 분,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인과응보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 전혀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고전2:9) 이 말씀은 이사야서 64장과 65장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런데 수많은 설교자와 성도들은 깊은 고민 없이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 권선징악을 하시고 인과응보를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이해했듯이 오늘의 수많은 설교자와 성도들도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시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이 범했던 오류를 똑같이 범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왜 이렇게 하나님을 엉뚱하게 오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보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인간의 범주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볼 때도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도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하나님을 볼 때도 자기중심적으로 봅니다.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출20:5,신4:24,5:9)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말합니다(출20:5-6).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읽으면 대뜸 하나님이 정말 우리처럼 질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질투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질투의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인간은 항상 그래요. 인간은 모든 것을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보고 이해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해서도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보고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식의 틀 안에 가두어요. 세상에서 듣고 배운 선이해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보고 이해합니다. 심지어 자기 욕망과 이상을 하나님에게 투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다 원인과 결과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도 원인과 결과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해가 피상적이고 유치할 뿐만 아니라 뒤틀리고 왜곡되고 오염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범주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보고 이해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오염되고 더러워지는 거예요. 과학 지식도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오염되고, 사랑도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오염되고, 구원도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오염되고, 하나님의 계시도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오염되는 겁니다. 실제로도 하나님의 계시는 교회에 의해서, 수많은 설교자에 의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엄청나게 오염되고 왜곡됐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염되고 왜곡된 하나님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범주에서 이해된 하나님, 교회와 수많은 설교자들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을 버리고 빈탕에 서서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령님께 물으며 새롭게 배우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주일 강독 – 주일예배 후 진행되는 강독 - 을 통해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알기 위해 묻고 듣고 성찰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삶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 100퍼센트 사실이기 때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그러나 최대한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성령의 지혜를 신뢰하며 작업해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작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깊은 관심을 갖고 함께 해 주십시오. 너무도 소중한 이 작업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아는 영광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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