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최초의 신학자인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고전15:14,17,19)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롬10:9)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초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참 신앙입니다.
제자들의 행적을 봐도 예수님의 부활은 결정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 행하는 것들을 보면서 예수님이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크고 놀라운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믿었던 예수님이 너무도 무력하게, 너무도 뜻밖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너무 황당했을 겁니다. 너무너무 허망했을 겁니다.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을 겁니다. 제자들은 절망을 이기지 못한 채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뭉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절망에 빠져 의기소침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사도가 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들이 저토록 담대한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일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 것을 두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저들이 사도가 된 것이었고, 의기소침했던 저들이 목숨 걸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본래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사도가 된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행9장).
예,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초석인 이 사건은 매우 기이하고 낯선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매우 특이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사건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이야기(왕상17:17-20),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낸 이야기(왕하4:32-37),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 이야기(막5:35-43),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이야기(요11:38-44),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이야기(눅7:11-17), 또 베드로가 욥바에서 전도하다가 죽은 도르가를 살려낸 이야기(행9:36-40), 바울이 드로아에서 강론할 때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려낸 이야기(행20:9-12)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엄격한 의미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입니다. 이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때가 되어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처럼,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처럼, 도르가처럼, 유두고처럼 예수님도 살과 피를 가진 몸으로 살아났지만 다시 죽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났으나 다시 죽는 것은 부활이 아니에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짓밟아 승리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예수님 이전에도 없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없는(적어도 지금까지는) 정말 기이하고 낯선 사건입니다. 실제로 부활을 꿈꾸거나 상상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꿈꾼 자는 많지만 부활을 꿈꾼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류의 종교와 문화를 보면 압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 수많은 신화, 수많은 문화가 있습니다만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종교나 문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육체를 가진 존재로 살아난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어떤 형태의 삶이 계속된다는 내세에 대한 신앙은 널리 펴져 있지만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종교와 문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솔직히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주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마16:21)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대한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이구동성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해도 손에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믿기를 거부했습니다(요20:25).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 사건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매우 기이하고 낯선 사건입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사건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앤터니 플루는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거의 평생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노년에 유신론자로 회심하여 <존재하는 신>(2007년)이라는 책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신과 철학>이라는 체계적인 무신론 논증서를 써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인데요,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가 세상에서 경험해 본 수많은 사건들과 너무나 다르다, 이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비추어 너무도 일관성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도저히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부활논쟁. 61,66쪽). 영국의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개념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체의 부활은 배운 자들 사이에서 지혜로 통했던 모든 것과 맞지 않는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소름끼치는 관념으로 여겨졌다.”(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74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 어느 중교, 어느 문화에도 유례가 없는 참으로 기이하고 낯선 사건입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필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으로부터 기독교가 출발했습니다. 이 황당무계한 사건 위에 기독교가 서 있습니다. 이 황당무계한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이 무엇이기에 제자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증언한 것일까요? 우리는 마땅히 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냥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4년 전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묻고 탐구했던 것처럼 부활이 무엇인지를 깊이 묻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부활이 무엇인지를 묻고 탐구하려 합니다(예배 후 강론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고 탐구할 것임). 여러분께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시리즈 설교와 강론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온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의 틀에서 해방되는 은총이 임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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