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참된 자유의 길 (로마서6:1-11)

새벽지기1 2019. 1. 7. 06:35


자유, 자유,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기 소설 속 주인공 조르바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참 대단한 선언이지요? 조르바가 선언한 것처럼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모든 사람이 이 자유를 갈망할 겁니다. 저 또한 이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은 원하는바 자유를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다들 자유를 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욕망의 동물입니다. 뭔가를 욕망할 때 살아갈 힘이 생기는 욕망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다들 성공 욕망, 권력 욕망, 소유 욕망, 비교 우위 욕망, 성취 욕망, 인정 욕망, 쾌락 욕망, 장수 욕망 등등 수많은 욕망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염려와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끝없이 밀려오는 생존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비극을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욕망하는 동물이고, 너 나 할 것 없이 욕망을 향해 살고 욕망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의외로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그리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욕망이 좌절되고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지 자유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극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굴욕적인 인간의 수치이자 패배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런 인간의 비극적 현실을 가리켜 ‘죄의 종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옳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만물의 머리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하는 인간이 자유를 잃어버린 채 죄의 종노릇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굴욕적인 일이고 수치스러운 일이고 비참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수치와 비참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채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철학자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神)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팡세> 중에서) 옳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데, 자신의 비참함을 알되 하나님 앞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참함에 무너지지 않으면서 비참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아야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구원받을 수 있고,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진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죄를 알게 하려고 율법이 들어왔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5:20)

참 놀라운 말입니다. 매우 짧은 한 마디입니다만, 이 한 마디 속에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담겨있고,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 담겨있고,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신비와 역설을 믿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내치고 부정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죄를 알고 품는데서 출발합니다. 죄를 알고 품음으로써 죄를 이기고 넘어선다는데 기독교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와 상관없이 임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는 죄가 있는 곳에 임하고, 죄를 아는 곳에 임하고, 죄를 통해 임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참 신비하고 오묘합니다. 우리 머리로는 잘 납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네, 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6:1), 지금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꼭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피상적으로, 일차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꼬리를 잡아 본질을 흐리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말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

여기서 중요한 말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례를 끌어들였습니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식인데요, 세례에는 두 가지 표상이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어 매장되는 것을 표상하고, 물속에서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죄의 종노릇하는 옛사람은 죽고 의의 종노릇하는 새사람이 됐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됐다는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6:11). 그렇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바울은 이 표상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언뜻 모순처럼 보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주장과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이 다 사실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모순처럼 보이지라도 두 가지가 다 사실이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 수 있겠느냐?’는 바울의 주장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있거든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인데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살 수 없다고 말한 바울조차도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단언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단언했습니다(고전15:31). 왜 날마다 죽었겠습니까?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날마다 죽은 겁니다. 사실이에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습니다.

당연히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왜 이처럼 죽음을 강조했을까요? 바울이 죽음을 강조한 이유는 죽는 것 외에는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죄의 종노릇하는 몸이 죽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강조한 것입니다(6:18,22).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또 우리를 예수와 함께 죽이시는 것도, 죽는 것만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6:6).

 

저는 얼마 전에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저에게 2018년은 무척 힘들고 고통스런 한 해였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신산하고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과 갈등에 시달리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11월 중순의 어느 날에도 여느 때처럼 마음이 복잡하고 수많은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증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폭발해버릴 것 같다는 느낌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는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어 저는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몸이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저는 완전히 죽어 있는 저를 봤습니다. 하얗게 뼈만 남아 있는 저를 봤습니다.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원통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편안했습니다. 모든 것이 잠잠했고,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런 고요를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미동도 없는 절대 고요를 난생 처음 느꼈습니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번민과 갈등과 슬픔과 연민이 터질 것처럼 뒤죽박죽이었고, 숨을 쉬기가 힘들만큼 내적인 소요가 심했는데 죽고 나니까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잠잠했습니다. 온 세상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저는 그 고요가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무한한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죽으니까 잠잠해지더라고요. 죽으니까 고요해지고, 죽으니까 자유가 임하고, 죽으니까 숨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저는 죽은 나를 보는 이 낮선 경험을 통해서 죽음이 자유라는 것, 죽음이 가장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 죽음이 생명의 능력이고, 죽음이 생명살이의 힘이자 원천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죽음이 자유라는 것, 죽음이 안식이라는 것, 죽음이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 죽음이 구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우쳤습니다.

또 바울이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는지, 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단언했는지도 보다 생생하게 이해됐습니다. 죽어야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 죽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고, 죽어야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니까 죽음을 강조한 거라는 것, 죽는 것 외에는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없으니까 날마다 죽기를 힘쓴 거라는 것이 보다 생생하게 이해됐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음을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말한 겁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는다 함은 일체의 욕망에 대하여 죽는 걸 의미합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죽는 걸 의미합니다(요일2:16). 달리 말하면 죄의 실존인 나에 대하여 죽는 것, 죄의 실존인 너에 대하여 죽는 걸 의미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라는 존재가 죄의 실존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에 대한 모든 기대와 자부심과 희망을 내려놓는 것이 곧 나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너라는 존재 또한 죄의 실존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너에 대해 어떤 선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이 곧 너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에 대하여 죽을 때 비로소 나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너에 대하여 죽을 때 비로소 너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해방되고 너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임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자유가 임해요. 죽음이 곧 자유입니다.

 

또 죽음이 곧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네가 지은 죄를 덮거나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용서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용서는 죄를 덮거나 기억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사람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하여 죽어야 비로소 완전한 용서가 가능해져요. 예, 용서는 죽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죄 지은 자에 대한 죽음이에요.

또 죽음이 곧 관계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모든 관계의 끝이요 단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 곧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실존인 내가 죽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또 죄의 실존인 너에 대하여 죽어야 너와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모든 관계 단절이 왜 벌어집니까? 너에 대해 죽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고 싸우고 틀어지는 겁니다.

 

결국 나에 대해 죽고 너에 대해 죽을 때,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부활생명으로 일으킴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을 때 부활 생명으로 일으킴 받습니다. 나에 대해 죽고 너에 대해 죽을 때 자유가 임하고 평화가 임합니다. 물론 예수 밖에서 죽는 것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예수 밖에서 죽는 죽음은 단지 죽음일 뿐이에요. 그러나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아름다운 관계를 주고, 참된 생명을 주고, 참된 평화를 줍니다.


그래서 바울이 날마다 죽은 겁니다. 저도 얼마 전에 죽은 나를 보는 낮선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날마다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새로운 한 해를 출발하면서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미 무덤에 묻힌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환기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부활의 능력 안에서 참된 신앙의 기쁨, 참된 자유의 기쁨을 맛보고 경험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권면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