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를 사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하루하루였을 텐데, 눈을 뜨기가 힘들 만큼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을 테고, 마음과 영혼이 짓눌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을 텐데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정말 애쓰셨습니다. 목사로서 한 해 동안 힘써 달려온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와 격려를 보냅니다. 내일이 지나면 2018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함께 나이를 먹습니다. 저도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이제는 수염이 하얀 늙은이가 됐습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누구보다도 팔팔한 소년이고 청년입니다만 육체적으로나 살아온 연륜에 있어서는 벌써 적잖은 나이가 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적잖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하고 불편한 일이더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고 유익할 일이 뭡니까? 돈방석에 앉는 것입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여행을 하는 것입니까? 여유 있게 먹고 노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본인에게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겠지만 곁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깊은 행복과 아름다움과 유익을 선사하지는 않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행복과 아름다움과 유익함을 선사하는 일은 서로가 함께 할 때 발생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하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고,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하고, 1등과 꼴찌가 함께 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 모두는 깊은 행복과 아름다움 유익함을 얻습니다.
푸른 잔디 위에서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뛰놀 때 아이들은 무한한 행복을 느낍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들 잔해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최근에 영국 가수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는데요 수만 명의 관중이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떼창을 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다윗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익한지를 역설했습니다(시133:1-3). 옳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영생(참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도 다른 게 아닙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원수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엡1:10). 이것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이고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하나님은 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되게 하시는 걸까요?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살라고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왜 굳이 용서와 화해를 통해 관계 회복을 시도하는 걸까요? 그것은 생명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함께 하지 않으면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봅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관계를 이루고 친교하면서 연합을 이루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그렇다면 또 물읍시다. 하나님은 왜 홀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복잡하게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걸까요? 그것도 역시 생명이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생명일 수 없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친교하면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지 않으면 결코 생명일 수 없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세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천착한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 존 지지울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교 없이는 아무 것도, 하나님조차 실존하지 않는다.”
“친교 없이는 참된 존재가 없다.”(친교로서의 존재. 15,16쪽)
옳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관계이고, 관계의 본질은 사랑의 친교입니다. 거꾸로 말해도 됩니다. 사랑의 친교가 곧 관계이고, 사랑의 친교가 있는 관계가 곧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 몸도 60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60조 개의 세포들이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서 우리 몸을 이루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60조 개의 세포들의 관계가 곧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포들의 관계가 단절되면 생명이 죽습니다. 세포들의 관계 단절이 곧 죽음이에요. 질병도 다른 게 아닙니다. 세포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어긋난 것이 곧 질병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이 혼자로서는 생명일 수 없기 때문에, 남자만으로도 생명일 수 없고 여자만으로도 생명일 수 없고 오직 남자와 여자가 서로 관계를 이루어야만 생명일 수 있고 생명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명을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이라는 구별된 실체를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 서로 함께 친교를 이루는 관계에 생명의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여 친교를 이룰 때 가장 행복하고 기쁘고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것처럼 힘들고 복잡하고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참 불편합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귀한 사람이라 해도 옆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입니다. 아무리 신경 안 쓴다, 안 쓴다 해도 신경을 안 쓰는 것 자체가 이미 신경 쓰는 것이고, 신경 쓰는 만큼 불편합니다.
사람은 제각각 다릅니다. 기질이 다르고, 습성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고, 기준이 다르고, 호불호가 다릅니다. 거기다가 다들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어딘가는 막혀 있고, 어딘 가는 허물어져 있고, 어딘 가는 그늘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외 없이 불의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함께 하는 일이 쉽겠습니까? 세상에 이것처럼 어렵고 복잡하고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면 반드시 긴장과 갈등이 생깁니다. 아무리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해도 반드시 오해가 생기게 되어 있고, 뭔가가 어긋나게 되어 있고, 속이 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꼭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선의로 대하는데도 오해와 갈등이 생기고 어긋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런 말 한다잖아요. 손주들이 오면 너무너무 반가운데 가면 더 반갑다고.
최근에 SNS에서 누군가가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쓴 글을 봤습니다.
[늦으면 궁금하고 옆에 있으면 답답하고... 오자마자 자면 섭섭하고 누워서 뒹굴면 짜증나고... 말 걸면 귀찮고 말 안 걸면 기분 나쁘고... 누워 있으면 나가라 하고 싶고 나가 있으면 신경 쓰이고... 늦게 들어오면 열 받고 일찍 들어오면 괜히 불편하고...]
좀 씁쓸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예요. 누군가를 답답하게 하고, 섭섭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고, 귀찮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열 받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깊이 이해한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은 말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라 할지라도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맞습니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살아가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고 짜증나고 귀찮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라 해도 함께 하다 보면 반드시 이런저런 오해와 갈등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잘 통하는 사이라 해도 내 마음을 100% 이해해주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아예 혼자 사는 쪽을 택합니다. 남하고 엉키는 게 싫고, 엉키면 힘들어지니까 아예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술 먹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 게임하고, 혼자 일하는 쪽을 택합니다. 올 해 ‘나나랜드’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나나랜드’라고 한다는데 전문가들은 ‘나나랜드’가 앞으로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정녕 그럴 겁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나나랜드’로 내달릴 것입니다. 일단은 그것이 쉽고 편하니까, 누군가와 엉키면 좌우지간 오해와 갈등이 생기고, 피곤하고 불편한 일들이 생기고, 상처받는 일들이 생기는데 ‘나나랜드’로 가면 굳이 이런 어려움들을 안 겪어도 되니까 사람들이 점점 더 ‘나나랜드’를 선호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사람들의 심리적 거리가 더 멀어질 것입니다. 가족들의 심리적 거리도 멀어질 것이고, 친구들의 심리적 거리도 멀어질 것이고, 성도들의 심리적 거리도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심리적 온도 또한 점점 차가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런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나나랜드’를 선호하는 ‘나홀로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볼 것 못 볼 것 다 봐야 되고, 이 사람 저 사람 받아주고 견뎌내야 하니까 아예 혼자 기도하고, 혼자 예배하고, 혼자 성경공부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 결과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성도가 무려 23.3%로 파악됐습니다. 이 숫자를 한국교회 성도 수에 대입하면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이 가까우면 이런 경향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예, ‘나나랜드’가 이 시대의 트랜드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나나랜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나나랜드’는 죽음의 땅이자 지옥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만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 있는 변화나 성장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변화와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군중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부딪치고 부대끼고 이런저런 아픔과 고난을 겪어내야만 완고한 자아가 깨어지고 마음이 깊어지는 변화와 성장이 일어납니다. 내 옆에 네가 있을 때, 내 앞에 네가 서 있을 때, 다시 말하면 너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볼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가 보이고 나의 한계가 보이고, 나의 한계가 보일 때 비로소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하고 성장할 때 행복과 기쁨과 생기발랄함이 살아납니다. 생명이 약동하고 생명살이가 회복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생명은 관계입니다. 생명은 구별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관계 속에서 열매 맺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관계를 긍정하고 관계를 존중하는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은 ’나나랜드‘를 꿈꾸며 그리로 내달리고 있는데 이 시대의 트랜드인 ‘나나랜드’로 내달리지 마시고 오직 관계를 긍정하고 존중하는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생명을 확인하고 생명을 경험하는 이곳은 ‘나나랜드’가 아닌 ‘너나랜드’입니다. ‘나나랜드’가 죽음의 땅인 반면 ‘너나랜드’는 생명의 땅입니다. ‘나나랜드’가 지옥인 반면 ‘너나랜드’는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너나랜드’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길은 무척 어렵고 복잡하고 피곤한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찾는 이가 적은 이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너나랜드’로 가야만 생명이 변화하고 성장하니까, 생명이 약동하고 생명살이가 회복되니까, 행복과 기쁨과 생기발랄함이 살아나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너나랜드’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길을 가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 판단하고 서로 선을 그어서는 절대 이 길을 갈 수 없어요. 서로 미워하고 서로 판단하고 서로 선을 긋는 것으로는 ‘나나랜드’만 갈 수 있지 ‘너나랜드’로 갈 수는 없습니다. ‘너나랜드’는 오직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함으로써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마22:39),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라(마6:14), 서로 짐을 지라(갈6:2), 피차 복종하라(엡5:21),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골3:16),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부탁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하는 방식으로만 ‘너나랜드’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해야만 서로가 함께 할 수 있고 서로가 함께 해야만 생명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라, 서로 용서해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짐을 지라, 피차 복종하라,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 길을 갑시다. 예수님이 부탁하신 이 길을 갑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배웠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 힘께나 쓴다는 사람들은 모두 ‘나나랜드’로 내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너나랜드’로 갑시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길을 갑시다. 말씀샘교회를 ‘너나랜드’로 만들어갑시다. 주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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