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된 신앙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위기는 위선, 타락이 생기면서 시작됩니다. 신앙에 위기가 오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면세계에는 우상숭배, 성적 타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마음을 알겠는가. 내가 형식적으로 해도 하나님은 속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 70년 간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 축복, 회복을 원하셨습니다.
드러나는 죄악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그럴듯했습니다. 그들은 금식도 했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내가 눈물을 흘리고 예수를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과 같습니다. 1절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크게 외쳐라. 나팔처럼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허물을 밝혀라.”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크게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소리를 높여라’는 것은 ‘투명하게 하라’,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몸에 병이 있으면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암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발견했으면 감사할 일입니다. 축복입니다. 발견해야 수술도 하고 치료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결국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치우면 그 밑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듯이, 커튼을 열면 그 안의 쓰레기가 보이듯이 하나님께서는 “네 안에 있는 숨어있는 죄악을 더 이상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부끄럽지만 그것이 축복입니다.
형식적 금식을 책망하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드러내라고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고 내 길 알기를 기뻐하는 듯하니 그들이 마치 올바르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은 민족 같구나. 그들은 무엇이 올바른 가르침인가를 내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우리가 금식을 하는데 왜 주께서는 보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통회하며 괴로워하는데 왜 주께서는 모른 체 하십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라. 금식하는 날에 너희는 너희가 즐겨하는 일을 하고 있고 너희가 부리는 일꾼들을 혹사시키고 있구나.”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금식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 않습니까? 왜 응답하시지 않습니까?”라며 대들었습니다. 금식에는 통회와 고통이 따릅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이유는 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스스로 겪으며 기도하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가끔 “내가 새벽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남모르게 봉사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대가가 무엇입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3절 하반 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금식하는 날에 너희는 너희가 즐겨하는 일을 하고 있고 너희가 부리는 일꾼들을 혹사시키고 있구나.” 하나님은 금식을 보신 것이 아니라 내면을 보셨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내용은 오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금식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심하게 부립니다. 그 사람들은 예배도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교회에 온 것을 기뻐하실까요?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
4~5절입니다. “보라. 너희는 싸우고 다투면서 금식을 하고 못된 주먹질까지 하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너희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면 차라리 오늘 같은 날에는 금식을 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받고 싶은 금식,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란 말이냐? 그저 갈대처럼 고개를 숙이기만 하고 굵은 베옷과 재를 펼쳐 놓는 것 뿐이 아니냐? 이것이 너희가 금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이것이 너희가 여호와께서 기꺼이 받으실 만한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냐?”우리도 교회 오면서 ‘왜 그 옷을 입었느냐, 왜 그 신발 신었느냐’하면서 한바탕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싸울 거면 교회가지 말자고 하면서도 교회에 들어올 때는 얼굴 표정을 바꿉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식하면서 다투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금식하면서 왜 주먹질이냐. 그럴 거면 금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금식을 기뻐하시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금식하면서 오락을 했다. 둘째, 아랫사람을 혹사시켰다. 셋째, 금식하면서 싸움질하고 주먹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금식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금식을 한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갈대처럼 고개를 숙이고 슬픈 표정을 하고 굵은 베옷과 재를 뒤집어쓰고 하는 금식에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입니까. 6절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런 것들이 아니냐?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의 줄을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모든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있습니다. 첫째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악한 권력자에 의해서 고난 받는 지체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쁜 사람들에게 고난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진짜 금식입니다. 둘째 압제 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강자에 의해서 눌린 약자들을 돌봐주는 것이 참 금식입니다. 셋째 모든 멍에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멍에는 부당하게 진 무거운 짐을 말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약자들, 억울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진짜 금식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난한 노숙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고 네 혈육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이것이 진짜 금식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하실 텐데 우리는 이런 문제는 관심이 없고 자기 문제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가족 문제만 관심이 있지 주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통이 있는 사람들은 나와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북한은 권력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고 병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약자를 보는 눈, 억울한 사람들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최대의 약점은 억울하고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참된 신앙을 갖는 것보다 매일 촛불시위하고 폭력을 행하는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동시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비자 없이 들어온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자가 없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가 도와주고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문제는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가 그들을 돌봐주기를 원하십니다.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고 그들을 편히 대해주라는 것이 참된 금식의 정신입니다.
참된 금식의 축복
이렇게 진짜 금식을 하면 어떤 축복이 올까요. 8절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네 빛이 새벽 동녘처럼 터져 나올 것이고 네 상처는 빨리 아물 것이다. 그리고 네 옳음을 밝혀 주실 분이 네 앞에 가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 거지들,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법을 어겨 갈 곳이 없는 사람들, 특별히 외국인 범죄자들의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우리가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네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 새벽 별처럼 빛나게 해주겠다. 둘째, 네 상처가 빨리 아물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네 앞에서 인도하실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이 네 뒤를 보호해줄 것이다.
9~10절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네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는 ‘내가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너희 가운데서 억누르는 멍에와 손가락질과 못된 말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굶주린 사람에게 열정을 쏟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네 빛이 어둠 가운데 떠올라서 네 어둠이 대낮처럼 밝아질 것이다.”여러분, 집이 없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을 도와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억울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도와달라고 할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는 많이 하는데 희생, 헌신이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여러분은 무슨 희생을 하셨습니까. 무슨 손해를 보셨습니까. 손해나 희생 없이 응답만 구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시지는 않습니까. 이것을 다 포기하면 빛이 어둠 가운데 떠올라서 대낮처럼 밝아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되리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언제나 이끄시고 땡볕이 내리쬐는 마른 땅에서도 배불리시며 네 뼈를 단단하게 하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다.”우리가 원하는 것이 여기 다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약자를 돌보고 손해를 보고 희생하면 축복은 계속됩니다. 12절입니다. “네 자녀들이 옛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진 기초를 세울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서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사람’, ‘거리를 사람 살도록 만든 장본인’이라고 부를 것이다.”저는 여러분 모두 이런 별명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마을, 동네, 아파트가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소는 청소부 아줌마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쓰레기를 줍고, 흐트러진 것을 반듯하게 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여러분이 먼저 하십시오. 교회 안에서부터 하십시오. 저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에 늘 복잡합니다. 누군가 정리를 하고 쓰레기를 줍고 부족한 것을 막아주고 떨어진 것을 붙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면, 병든 자를 돌보면, 조건 없이 희생하면 그런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13절입니다. “네가 안식일에 발걸음을 삼가고 내 거룩한 날에 네가 즐겨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네가 안식일을 ‘기쁜 날’이라고 부르고 여호와의 거룩한 날을 ‘귀한 날’이라고 하면, 네가 이 날을 귀하게 여겨 네 마음대로 하지 않고 네가 즐겨하는 일을 하지 않고 수다를 떨지 않으면”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식일에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만 골라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에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다니지 마십시오. 수다를 떨지 마십시오. 어떤 분은 ‘주일날 오랜만에 쉬는데 좀 쉬라고 하지. 왜 이런 말씀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때에야 비로소 너는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고 내가 너를 땅에서 높이 올려 네 조상 야곱의 유산을 먹고 살게 하겠다.” 여호와께서 친히 입으로 말씀하셨다.”누구나 이것을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이것을 구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만 하고, 이기적으로 기도하고,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고, 시간도 돈도 아까워하고, 부자들만 사귀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관심은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만찬에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나누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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