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생명을 걸고 쓴 마태의 선교복음

새벽지기1 2018. 12. 16. 07:32


마태는 아직도 우리에게 ‘복음의 성취를 위해서는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더 많은 순교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순교를 통해 이뤄진 기독교 


어느 날 저는 감비아에서 마태복음 1장 1절을 읽으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마태는 생명을 걸고 죽을 각오로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 다윗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은 당시 유대인을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유대인의 자존심인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기록된 ‘임마누엘’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 17절에서는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는 음성이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방인이 큰 빛을 보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는 매 장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큰 빛으로 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12절은 더 놀랍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의 이 메시지는 유대인들을 굉장히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해서 전부 지옥에 갈 것이고, 이방인들이 다 와서 하나님이 약속한 자리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자리에 앉을 것이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싸움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13억 명의 모슬렘과 8억 명의 힌두, 4억 명의 불교와 수많은 미전도종족이 있습니다. 생명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순교를 통해 이뤄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안전만 생각한다면 복음을 증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마태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은 증거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 순교를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꿨습니다. 그들은 잘 사는 나라, 파워가 있는 나라, 전 세계를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어 줄 그런 정치적 메시아를 꿈꿨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주님을 만나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지 알았기에 가족도 포기하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도 포기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마태복음은 반유대적입니다.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말합니다. 이 땅에서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유대적인 내용은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있는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 성전에 있는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없는 유대인, 하나님이 없는 유대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성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곳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유대인이 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9월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130만 명이 로마 병정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기록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성전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전입니다.   


선교를 통해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  


마지막으로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교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믿고 선교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마태의 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기 전에 마태복음을 읽으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5장에서는 마지막 때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짜 메시아, 지진, 전쟁, 윤리적 부패, 타락, 배교 등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것으로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이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돼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될 것이다. 그때서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마태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의 왕국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천국복음이 온 나라에 전파될 것이고 그 때 끝이 올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그 때가 되면 큰 환난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환난과 함께 큰 부흥이 올 것인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고, 그 다음에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숫자를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숫자가 채워지면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그 어떤 이유로도 멈출 수 없습니다. 선교는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핍박과 고난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선교지에 가지 않더라도 마태는 우리에게 초대교회와 같은 순교적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직도 우리에게 ‘복음의 성취를 위해서는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더 많은 순교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순교적인 삶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명의 처녀가 신랑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대해 마이크 비클라는 분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는 화장하고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단장한 모습이 아니라 군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는 사단과 싸우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오도록 복음을 위해 순교적 삶을 기대하고 이겨야 할 군화를 신고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마르투스’인데 이는 ‘순교자’라는 뜻의 영어 ‘martyr’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쉬운 선교, 쉬운 전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순교’가 우리 눈에는 슬프고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일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순교적인 삶으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주의 나라를 위해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