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고난당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1-8)

새벽지기1 2018. 5. 1. 07:51


고난당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1-8)


본문


1.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서론

 

다음은 어느 분이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마라

인생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짐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 때 시리고 아픈 가슴없이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어느 한쪽 슬픔과 아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짐입니다.

가난도 짐이고, 부유도 짐입니다.

질병도 짐이고, 건강도 짐입니다.

책임도 짐이고, 권세도 짐입니다.

헤어짐도 짐이고, 만남도 짐입니다.

미움도 짐이고, 사랑도 짐입니다.

살면서 부닥치는 일 중에서 짐 아닌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럴 바엔 기꺼이 짐을 짊어지세요.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은 강을 건널때 큰 돌덩이를 진다고 합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랍니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진흙탕에 빠져서 헛바퀴가 도는 차에는 일부러 짐을 싣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짐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내 등의 짐은 내 자신에게

선물이고 스승이고 조련사 입니다.>

어떻습니까? 공감이 가십니까?

 

주일 예배에 처음으로 교회 예배에 나온 아기를 축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에 앞서 아기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년전! 우리교회 황옥순권사님 며느리가 가사 일을 하다가 물건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갔는데 아직도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은 지 8개월쯤 되는 어느 날!

환자를 간호하던 간호사가 보니 환자의 자궁에서 아기 다리가 보이더랍니다.

임신 사실을 모르고 여러 가지 약을 투여한 거지요.

다행이 그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바로 오늘 이 아이가 그 아기입니다.

지금 할머니께서 어렵게 키우고 있는데 기도 많이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 점심 떡은 권사님께서 손주 백일 떡을 섬겨주셨습니다.

이 아기 건강을 위해기도 많이 해주세요.>


나는 차마 그 떡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형제는 어머니께서 지난 해 암 수술을 했는데 암이 재발해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울먹였습니다.

또 한 자매는 꼬여 버린 교우 관계 때문에 아파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 합니다.

수차례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해서 고통 받는 청년!

대학을 졸업한지 수년이 지났는데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청년!

요즘 이렇게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이 참 많은 것 같아 많이 안타깝습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 성도들은 무엇이 가장 힘든 일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야고보서는 바로 그런 성도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오늘날의 시련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고난>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괴물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이 서신의 수신자들로서

바벨론 포로로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크리스찬들과

그들로 인해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교의 핍박을 받고 있던 크리스찬 성도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일반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서 에베소서등 특정한 지역교회에 보낸 서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신서 21권 중 바울 서신 14권을 제외한 7권의 서신서-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한일. .삼서 그리고 유다서-를 일반 서신(General Epistle) 또는 공동 서신(Catholic Epistle)이라고 합니다.

 

본론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닥쳐오는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첫째, 믿음의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2-3)

 

먼저 용어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22:1의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이는 바로 믿음의 시험(test)’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훈련입니다.

다음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temptation-;페이라조)’ , 유혹(temptation)을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tempt)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4:1-2)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temptation)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temptation)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3-15)’

그리고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시험(trial-(;페이라스모스)’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시험(trial)’은 일종의 하나님의 test라고 할 수 있습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시험을 어떻게 기쁘게 여길 수 있을까요?

여기서 기쁘게 여기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기쁘다기쁨으로 충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 왔는데 어떻게 기쁨이 충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12절이 그 해답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래서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기다라는 단어는 그럴 자격(상황)이 없거나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하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여기다의 신앙입니다.

기독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서 의롭게 여긴다입니다.

제가 로마서45-8절을 읽겠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는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여겨셨다>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는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2-4)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

첫째,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3)이며

둘째,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보통 극한 고통을 만날 때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토스토에프스키9년 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한 뒤 죄와 벌같은 명작을 썼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 단테는 정적들에 의해서 추방되어 방황한 뒤에 신곡이란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헨델은 반신불수로 감옥에 갇힌 후,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명곡 메시야를 작곡했습니다.

존 번연은 얼음장 같은 감옥속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고통과 시련에 용감하게 맞선 삶들에 의행 새로 쓰여 졌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며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잔뜩 움츠린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고 바람을 이용해 유유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바이킹은 북풍에 시달릴 때 큰 배를 만들었다.

위인들은 인생의 위기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시련을 신의 저주로 여기고 움추리는 사람이다.“

 

한동대 이지선교수는 1978년에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4학년이던 2000730,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후 그는 열심히 인생을 개척해서 현재 한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일 뿐이지만

지금의 저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휘발류로 기름 부어 주시고

제 안에 있는 우상들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특별한 파송식으로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이것이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시험이라고 여기십시오.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기쁘게 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닥쳐오는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둘째, 믿음의 시련을 온전히 인내해야 합니다.(4)

 

찰스 코언이라는 곤충학자가 나비의 생태를 관찰했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과정을 관찰하던 찰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작은 구멍으로 힘겹게 나와 나비가 되는구나. 구멍을 넓혀주면 더 쉽게 번데기에서 나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찰스는 나비 고치를 몇 개 구해서 부화의 과정에서 살짝 칼로 입구를 넓혀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나온 나비들이 성장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찰스가 칼집을 내준 나비들은 한 마리도 제대로 날지 못하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다 죽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여러 고치를 구해서 서로 대조를 해보았지만 자력으로 빠져나온 나비들만이 제대로 날 수 있었고, 칼집을 내어준 나비들은 항상 결과가 똑같았습니다. 고치를 빠져 나오려는 나비의 몸부림 과정에서 윤활유가 나오게 되고 이것이 날개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데, 찰스가 칼집을 내준 나비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유익과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 4절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성도는 시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텔레이오스)’완전히또는 흔들림 없이’ ‘끝까지라는 의미이며,

구비하여(;홀로크레노이)’모든 부분에서 완비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내라고 하지 않고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시공간적으로 모든 것이 온전하여짐을 말합니다.

여기에 뚜렷하게 해당되는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과 다윗입니다. 둘 다 애매한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부당하게 형들에게 애굽에 팔려가서 꿈 많은 청소년 시절 애굽인의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또 그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부당하게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참 인생이 기구하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요셉을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놓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 올리셨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5년이나 걸렸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충분히 인내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던 사람들(보디발의 아내, )에게 보복할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목동으로 잘 살고 있던 그를 불러낸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청년시절은 험난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이후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로 목숨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부당한 고난 애매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동지들은 동굴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복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정당방위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

다윗은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도 결코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다윗은 어느 날 닥쳐온 치명적인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야고보장로가 말한 온전하고 구비하여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벧전2:19).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10:3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예기치 않은 고난이 닥쳐왔을 때

적당한 인내’ ‘나름의 인내가 아니라, ‘온전한 인내를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닥쳐오는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셋째, 하나님께 나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5-8)

 

오늘 본문 5-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특히 5절 말씀은 우리가 시험 볼 때 많이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장로가 이 말을 한 본래의 의미는 공부 잘해서 성적 잘나로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앞에서 시험 중에 인내하라고 권고한 저자는

이제 그 믿음의 인내를 성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800년전 BC700년경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 때의 일입니다.

당시 북방의 앗수르 왕이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침공해서 예루살렘을 에워 쌌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을 제가 쉽게 번역했습니다.

<앗수르가 여러 나라를 진멸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다고 버티느냐?

우리가 고산과 하란등 수없이 많은 민족을 정복했다.

그 나라들의 신들이 저들을 구원했느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모두가 멸망했다.>(왕하19:11-13)

이 편지를 받아든 히스기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히스기야도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왕하19:14-16)“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기적 같은 방법으로 앗수르를 진멸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삶 가운데 고난이나 역경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원망을 많이 합니까? 염려를 많이 함니까? 아니면 한탄하며 주저 안습니까?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욕심은 부릴수록 더 부풀고, 원망은 보탤수록 더 분하고,

아픔은 되씹을수록 더 아프며, 집착은 할수록 더 질겨진다.”

만약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가 고난이 찾아와도 기도하지 않는 다면

그 닥친 고난 보다 더 심각한 인생의 기로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자, 신실한 자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의지 할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의 기도는

결코 응답하지 않으신 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여러분을 보면서 늘 감동합니다.

특히, 화요 가지장 모임에 꼬박 꼬박 나오는 가지장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시대 진정한 천연 기념물입니다.

이것은 진심이며 칭찬입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큽니다.

기왕에 예수 믿으면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발만 담그고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제대로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열심히 말씀 읽고

때로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씨름도 하고 질문도하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통성으로 부르짖는 기도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아쉽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고난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십시오.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할 시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3:2-3)‘

 

결론

 

지난2014216, 이집트 시나이반도 타바 지역에서 발생한 자살폭탄테러범에 의해 생명을 잃은 김진규 선교사는 여행사에서 하도 간청해서 3월에 미국으로 선교사 훈련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고 선교 팀을 인솔하다가 뜻밖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현지 여행사의 대표인 제진수 씨와 함께 김 목사가 온 몸으로 폭탄테러범을 막지 않았다면 성지를 순례하던 진천 중앙교회 성도들의 희생은 훨씬 컸을 것입니다.

다음은 고 김진규 선교사가 쓴 글입니다.

이 땅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여 돌아가신 위대한 선교사들과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 그들은 왜 우리나라에 와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오다가 죽고, 언어 배우다가 죽고, 병에 걸려 죽었다. 조선이 바로 미전도 종족국가인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과 오랫동안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그들에게 죽거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하염없이 밀려온다. 그런데 왜 자꾸만 자꾸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것일까?

그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희생자이기도 했지만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의 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있지만 자신과 가족의 죽음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부인 박여진 선교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기도하고 있습니다.

테러를 일으킨 사람도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 테러로 무슬림을 미워하는 마음이 사람들 가운데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무슬림도 사랑하세요.

그들을 위해 더욱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뜻하지 않은 끔찍한 고난의 현장에서 이런 고백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난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을 실을 때 더욱 빨리 달린다.

이와 관련한 실감나는 경험담이 있습니다.

내가 특전사에 근무하던 초급장교 시절 천리행군이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한 달간의 야외전술훈련을 마치면 마지막 일주일은 반드시 천리행군(400km)을 합니다.

근무하는 동안 3번의 천리행군을 했는데

이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경남 함양에서 인천까지 행군했던 일입니다.

행군은 산악행군, 무장(60kg)행군, 야간 행군이 특징입니다.

첫날에는 무조건 80km이상 걸어야 합니다.

첫날 행군을 하고 나면 발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서 굳어 버릴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예비역들이 경험한 것이지만 가장 힘든 것은 군장이 아니라 졸음입니다.

어떤 때는 앞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으며 눈을 감고 행군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때 오히려 무거운 군장은 행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특전사 출신은 이 말의 의미를 모두가 이해 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역설입니다.

인생도 적당한 시련을 만날 때 인생의 가속이 붙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시련은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고난 당함을 기쁘게 여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