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참된 교회” (사도행전 13: 1-3)

새벽지기1 2017. 4. 11. 07:14


2000년전에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양극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열심당원 시므온과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무력마저 불사해야 된다고 믿던 행동대원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 마태는 로마제국에 빌붙어서 동족의 고혈을 짜내던 불의한 인간이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므온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의한 마태 세리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공적 제1호였고 마태의 관점에서 본 시므온은 천하대세를 읽지 못하는 철부지 급진주의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리마대 지방의 재벌 요셉이 있었고 갈릴리의 빈민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비천한 창녀 막달라 마리아와 존귀한 신분의 산헤드린의원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이들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한 테이블에 앉는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과 인간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끝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렸던 중보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바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이질적인 제자들이 지금 현재 주님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도 계속 하나이기를 마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하나이신 듯이 하나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하나되는 길은 사랑하는 것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년전 월드컵 경기가 열렸을 때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어디서나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모두 하나가 된 것과 똑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와같이 새로운 계명을 주신 까닭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주님을 믿는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는 결코 거창하거나 먼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주님을 믿는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 길이요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서로 하나 되라는 이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삶 속에서 구현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안디옥교회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북방 500km 지점에 위치한 안디옥 소재의 교회입니다. 현재 터키 영토인 안디옥을 찾아가면 지금도 2000년전에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배드렸던 동굴이 남아있습니다. 그 동굴이 얼마나 협소한지 아무리 많이 앉아도 몇십명 이상이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2000년전 안디옥교회는 지극히 작은 공동체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하는 당신의 도구로 이 작은 안디옥교회를 쓰셨습니다. 어떻게 그 큰일에 이 자그마한 교회가 쓰임을 받을 수 있었겠는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게 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안디옥교회에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엘과 및 사울이라”

본문에는 안디옥교회의 지도자 그룹, 요즘 용어로 말하면 당회원 명단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바나바라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이프러스 섬 유력가문 출신인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정통 유태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입니다. 성경은 니게르의 나이라든가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니게르였다는 사실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라틴어 “니게르”라고 하는 단어는 ‘검다’는 뜻으로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니그로’ 즉 흑인입니다. 시므온은 흑인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00년전 유태인들은 극심한 인종차별 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 흑인 노예가 안디옥교회 당회원의 명부에 올라왔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구레네 출신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리비아입니다. 루기오라는 사람은 구레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는 전혀 무명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인물인 헤롯대왕의 아들이요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여기에 젖동생이라 번역된 헬라어 ‘심트로포스’는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친형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단짝으로 지낸 ‘죽마고우’를 뜻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심트로포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든간에 마나엔이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으로 불리웠다는 사실 자체는 그 역시도 2000년전 불의한 지배계급에 속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으로 불릴 까닭이 없습니다. 당시 유태인들이 보기에 헤롯이나 마나엔 같은 지배계급이야말로 증오와 원한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이완용처럼 제거해야 마땅한 매국노였습니다. 마지막 인물이 사도바울로 불리기 이전의 사울입니다. 그는 비록 회심하였을망정 예수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요 예수님의 제1 대적자였습니다.


이 다섯사람은 이처럼 전혀 이질적이어서 한 그룹에 소속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담임목사 바나바나 혹은 같은 유대인이었던 사울이 매국노, 흑인, 무명의 이방인을 그 교회의 장식품으로 혹은 대외 홍보용으로 영입해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후에 주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해 보내셨을 때에 남은 세사람, 즉 흑인 노예 출신 시므온, 무명의 루기오, 그리고 매국노 출신 마나엔이 안디옥교회를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끌어 나갈 정도로 그들은 완벽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지마는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힘입어 온전히 하나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2000년전 안디옥교회야 말로 가장 이상석인 Catholic 교회였습니다. 주후 381년 니케아 콘스틴디노플 공의회는 교회를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바로 이 정의속에서 세워지고 구축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편적인 교회라고 하는 이 용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바로 Catholic Church가 됩니다. 그 이후에도 2C가 지나서 확정된 사도신경속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공회 역시 Catholic Church라는 의미 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다 한 입으로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뉴저지의 초대교회는 거룩한 Catholic 교회이어야 함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모든 교회는 Catholic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단지 천주교가 Catholic 이라는 용어를 먼저 썼기 때문에 본래 의미의 Catholic 교회와 구별해서 전문용어로 천주교를 Roman Catholic Church 라고 부릅니다.

 

로마에 있는 교황의 지배 하에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개신교는 Catholic Church라는 용어 대신에 Universal Church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Catholic 이든 Universal 이든 그 의미는 모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직업, 연령, 출신, 재산 정도를 초월해서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통파 유대인, 흑인노예, 무명의 이방인, 매국노, 예수의 대적자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던 가장 이상적인 Catholic 교회였고 주님께서 이 Catholic 교회를 통해서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하셨던 것은 사필귀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우리의 신앙경력을 통해서 확인했고 경험했듯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하에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문속의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Catholic Church를 이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그 이유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본문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따로 세운다는 헬라어 ‘아폴리어’는 ‘풀어준다’ ‘해방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바울과 바나바를 자기 생각 속에 묶어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저 두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 ‘저 두 사람들은 언제나 안디옥교회의 교인으로 살아야한다‘ 이처럼 두 사람을 자기 편견의 감옥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디옥교회의 교인들로 하여금 바로 그 편견의 감옥으로부터 두 사람을 과감하게 풀어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두 사람을 자기 편견의 감옥으로부터 과감하게 풀어주고 그들의 머리에 안수한 뒤에 그들을 보내어 주었습니다. 분명히 3절은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이 두사람을 보내어 주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절은 이와는 상반된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본문 4절은 두 사람을 보내신 주체가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 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자기 편견의 감옥속에 가두어 두고 있다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안디옥 교인들은 두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그들의 눈으로 똑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두사람을 자기 편견의 감옥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한 그들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를 그들은 확인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혀 이질적인 이 사람들이 어떻게 Catholic 교회를 이룰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제 그 단서를 얻게됩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과 이미지만을 기억하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상대가 아닌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제 3자의 말만듣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런 사람이겠거니’하고 속단해 버립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만났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왜곡된 자기 편견의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Catholic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들속에는 불필요한 오해와 오인, 갈등과 대립이 날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찬들은 이제까지 내 편견의 감옥속에 방치해 두었던 사람을 과감하게 풀어줌으로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들의 실체를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줌으로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 아니 나를 통해서보다 그를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확인함으로 비로소 하나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통파유대인, 흑인노예, 무명의 이방인, 매국노, 예수의 대적자 이런 전력을 가진 다섯 사람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할 때에 그들 사이의 문화적, 사회적, 지적 수준 차이로 인한 갈등은 얼마나 컸겠으며 답답한 일은 얼마나 잦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상대를 자기 편견의 감옥속에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흑인노예일망정

그들은 내 편견의 감옥으로부터 완전히 풀어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상대를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확인하므로 날이 갈수록 그들은 하나의 교회, 거룩한 공회를 이룰수 있었고 바로 그처럼 Catholic 공동체화된 그 안디옥교회를 저들이 하나되게 기도하셨던 주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셨던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국내에서 성경적인 의미에서 가장 이상적인 건강한 Catholic 공동체를 하나만 들어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을 들겠습니다. 예수원에 가면 그곳 상주회원들은 명실공히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력, 경력, 출신지역, 경제적 역량을 초월해서 온전히 하나되는 보편적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공회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한국사회속으로, 혼탁한 대한민국속으로 부패해가는 한국교회속으로 당신의 생명수를 흘려 보내고 계십니다. 성공회 출신 토레이 신부님이 신앙의 실험장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강원도 황지를 찾은 것은 1965년이고 그해 연말까지는 겨우 본관 한 동만을 건축했을 뿐입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다시 공사를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토레이 신부님께서는 건물을 짓기 전에 건축자재를 나를수 있는 도로를 닦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일이 사람들이 지게로 건축자재를 나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트럭이 다닐수 있는 도로를 닦기 위해서는 중장비를 구입해야 했고 도로가 지나는 땅주인들과 임대료를 협상해야 하는 등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더라도 토레이 신부님은 도로건설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황지를 찾아가서 그동안 신부님께서 무슨 계획을 입안하시든 신부님에게 절대 동의하던 예수원 가족들이 신부님에게 반대를 하고 나선것입니다. 먼저 도로를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몸이 으스러질지언정 계속 앞으로 자재를 지어 나를 터이니 불필요하게 막대한 돈을 들여서 이 산속에 트럭이 지나가는 도로를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에 한국 성공회 대학 학장을 역임하셨던 토레이 신부님을 무학이거나 무경력 소유자인 그들의 의견을 얼마든지 묵살할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원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토레이 신부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경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경력없는 저들보다 내가 더 우월할 것이라는 자기 우월의 감옥속에 그들을 방치해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토레이 신부님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토레이 신부님의 부인이신 제인 토레이여사는 자신의 자서전인 ‘예수원 이야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젊은이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생각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고 이 상황에 대해 너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도로를 내겠다는 소중한 소망을 포기했다. 이것은 우리의 목적이 좋은 도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웠다. 우리는 도로를 가지려는 우리의 욕망에 대해 죽었다. 우리는 3주동안 도로없이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광업회사가 기계와 트럭을 가지고와 우리집 앞을 거쳐 산 정상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었다. 숲속 나무를 베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나무를 다 베고 난 뒤에 그 길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예수원은 진정한 Catholic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통해서 성령님께서는 가장 크게 역사하심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조그마한 강원도 오지의 예수원을 통해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심령까지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처럼 함께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왜곡된 내 편견의 감옥으로부터 풀어줌으로 하나되어야 할 토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미국 천지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을 뉴저지 초대교회의 교인으로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사랑할 도리도 하나될 방법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어둠속에 빠져가는 사람들을 구원해 올리는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흔히 교회를 노아의 방주에 비견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와 관련해서 두가지 그릇된 오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아는 방주속에서 40일동안 기거했을 것이라는 오해이고, 두 번째는 그 방주 속 삶을 마치 천국과도 같았을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창세기 7장에 의하면 노아 8식구가 방주속으로 들어간 날은 600년 2월 10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8장은 601년 2월 27일에 방주에서 나왔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노아식구는 방주속에서 40일을 있었던 것이 아니고 무려 1년 17일을 기거했습니다. 그들이 방주속에 들어간 후에 일주일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간 뒤에 40일동안 비가 왔고요, 쏟아진 비가 무려 150일 동안 땅위에 창일해 있었습니다. 그 물이 다 빠지는데 또 다시 170일 걸렸습니다. 그 1년 17일 동안 노아 8식구만 방주속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로 인도해 들이셨던 하늘의 모든 종류의 새들과 땅위에 기는 모든 짐승들 역시 그 방주속에 1년 17일 기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때부터 그 방주속에 들어갈 모든 짐승과 새들이 먹을 먹이를 준비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을 해보십시다. 1년 17일 동안 밤낮으로 짐승과 새들이 울어댑니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을 것입니다. 짐승과 새들이 밤낮으로 오물을 쌉니다. 역겨운 냄새가 밀폐된 방주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 수없이 많은 종류의 새들과 짐승에게 어김없이 먹이를 날라다 주어야 합니다.


결코 방주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달콤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정신병에 걸리기 십상인 혼란과 혼돈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러나 노아 8식구중에 누구하나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8사람들이 마음이 뒤틀어 지거나 분열되고 대립한 적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1년 17일 동안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닫힘없이 온전히 하나될수 있었겠습니까? 창세기 6장 16절은 노아 방주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밝혀주셨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노아 방주는 3층으로 건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벽쪽에는 방주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이었습니다. 그 문은 노아 8식구가 방주속으로 들어가자 마자 하나님께서 닫으셨습니다. 1년 17일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그 방주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아무도 그 문을 열수도 없었고 내다 볼수도 없었습니다. 방주에서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창문은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 유일한 창문은 방주의 벽쪽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주의 지붕위에 뚫려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 8식구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생각하면서 이기적인 자기 자신들만을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그속에서 다 미치고 말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은 오직 천정에 하나 밖에 없었고 그들은 매일 그 창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굳은 일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시키셨기 때문에...

‘내가 왜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짐승의 오물을 치우는 이 짓궂은 일을 시켜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시키셨기 때문에,,. ‘왜 우리 부모는 우리를 이 밀폐된 공간으로 데리고와서 이런일을 시키는가?’ 하나님이 시키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 8식구는 온전히 한 마음으로 이상적인 Catholic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고 보편적인 교회인 그들 8식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펼치셨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 이름이 초대교회라고 해서 성경속에 있는 초대교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한 헌금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한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Catholic 교회요, 보편적인 교회요, 거룩한 공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 교회의 천정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창문을 뚫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 영혼의 창문에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뚫으십시오. 그 하나님만을 바라 봄으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 빼시고 빼시어서 이곳에서 함께 신앙생활하게 하실 사랑하는 교우들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과감하게 풀어줌으로 하나되는 이 시대의 Catholic 교회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시대의 역사를 밝히고 밝히실 것이요, Catholic 교회가 된 여러분의 교회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안디옥교회가 될 것이며, 그때에만 여러분들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비로소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여러분을 불러주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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