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정죄와 심판이 없고,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를 때가 많이 있다.
이 진리와 영광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진리에 목숨을 걸었고
평생을 인도하는 푯대로 삼았고, 이 진리와 영광 위에 견고하게 섰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망의 풍성함으로 남은 생애를 살았다.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새해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설날도 지났다.
신정, 구정을 지나면서 우리는 복 받으라는 인사를 넘치도록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 복이 그렇게 말하고 빌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일과 관계를 통해서 복을 쌓아갈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룬 복들은 공든 탑이 무너지듯 무너지고 말 날이 온다.
사고를 겪으며 지옥같은 인생을 살고, 죽음이 찾아오는 날, 소유했던 모든 것들을 두고,
지옥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중에 가장 큰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과 그 영광스런 축복이 무엇인지 확신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한 진노와 형벌을 면할 수 없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한 번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들 가르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다.
내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내 믿음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고,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24절,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25절, 예수께서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음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을 믿어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가 성립이 된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단지 여러분과 나의 죄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이를 믿지 못하면 그가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하나님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이 사실을 믿을 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가 성립이 된다.
우리 죄를 위하여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을 믿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2:2) 내가 --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길 바란다.
다음은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앞에서 말한 믿음의 내용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 전체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 되시고, 나는 그분의 종인 것을 기쁨으로
자랑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리더십으로 살지 않고 로드십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것처럼 믿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살아나심을 믿을 때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받은 의롭다 함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음을 믿으라
(롬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세 가지 복을 누리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누리는 복이 하나님과 화평의 복이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과 화목을 가로막는 것이 죄이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다.
우리가 다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분의 피로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목과 화평이 다시는 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여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구약시대에는 성전의 휘장이 가려져 있어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속죄일에 단 한번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 속죄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휘장이 예수님의 피로 찢어짐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보좌 앞에 곧장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믿고 누려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 어떤 피조물도 어떤 위기도 끊을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사망도 위기도 불행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권세자들이나 능력자들이나 어떤 높음도 어떤 깊음도 어떤 피조물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우리가 죄를 지을지라도 화평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 죄송하고 면목이 없는 것이다.
사랑의 징계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깨끗께 하여 주신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위기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이 하나님과 화평을 믿고
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도록 하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리라”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이 화평을 누렸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그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으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은혜의 영역에 들어갔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다.
이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사탄의 권세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기도 하고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고 핍박하고 속이기는 해도
그전 처럼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니고 죄의 종이 아닌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를 건드릴 수는 있어도 그의 지배와 권세에서 벗어났다.
로마서를 통해서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로 말미암아 믿음에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이 또한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번 은혜에 들어간 사람이 떨어져서,
다시 죄와 사망의 영역, 사탄의 영역, 아담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신 것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를 짖지만 그 죄 때문에 다시 아담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은혜의 영역에 들어갔으니 이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지난 주 말씀 드렸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성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아담을 통하여 우리에게 왕노릇 하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더욱더 넘치게 받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분과 특권을 말씀을 통해 믿으시기 바란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던 옛 시절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하나님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더욱더 넘치게 부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신다.
(롬 5:21)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심이라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는 영역에 우리가 살고 있는 복,
그 복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누리고 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어떤 상황,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은혜가 왕노릇하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4.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우리가 받은 복은 첫째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둘째는 은혜의 영역에 살면서 더욱더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하고 향해야 하는 곳은 우리의 목적지, 미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 이고 미래이다.
우리는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한다.
우리의 눈을 땅에다 두지 말고 하늘의 영광을 향해 눈을 들어야 한다.
너희는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그것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축복과 영광, 부흥과 기적이 일어났다.
고난 끝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성막을 다 지었을 때, 성전을 다 지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성막 성전이 다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욕심으로 영광을 지을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야 한다.
고난이 왔을 때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연단을 이루어야 한다.
그 연단이 우리의 소망, 우리의 영광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죄를 지음으로 오는 고난은 즐거워할 고난이 아니지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고 했다.
선(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다.
(벧전 1: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욕심과 달음박질로 이룰려고 하면 시련이 온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우리는 사망 대신 징계와 시련의 채찍을 경험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다.
그들이 받았던 고난은 긴 것 같았지만 무거운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그들이 영광을 받았을 때, 그들이 받은 고난은 그들이 받은 영광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우리는 소망으로 붙들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고 부지런하며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의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고난과 인내와 연단의 세월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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