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과 그분의 심판권(통치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품어주시고 치료해주시는 예수님의 성품만 보는 것은 상담가들의 치우친 생각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꺾을 권세도 끄실 권세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위로하고 격려하여 세우기 위해 안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과 함께 그분의 심판권도 보아야 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영원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보살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심하여 주님의 자녀로 인도되기까지이다.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 앞으로 영혼들을 인도한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상한 마음, 꺼져가사는 심지가 되지 않고서는
하늘을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어둠과 무질서와 공허감 속에서 살다가
어느날인가 그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의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주님께 돌아와서도, 때로는 꺼져가는 심지(smoking flax)처럼 침체되고 매운 연기만
품어내고, 이런 저런 일로 시험들어 상한 심령을, 주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보듬어주시고
심지를 돋우시어 영혼이 타오르게 해주신다.
그래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구원받기 전의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시련 가운데서 연약해진 모습이기도 하다.
주님의 제자들도 훈련을 받는 도중에는 이렇게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였다.
누가 더 크냐를 놓고 싸웠고, 주님의 보좌 좌우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다.
주님은 그들을 꺾거나 끄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요 13:12-15)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이셨다고 하셨다.
서로 마음이 상하게 하여 상한 갈대를 만들거나, 꺼져가는 심지도 끌 것이 아니라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가롯 유다가 자기를 배신할 줄 알면서도 그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시고 돌이키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탄이 한 번 들어간 뒤로는 돌이킬 수가 없어서 망하는 길로 가고 말았다.
다윗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갈대 나발을 처치할려고 하나님께 서원까지 하고 갔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아비가일을 통하여 돌이키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그의 원수를 갚아 주셨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나발들을 어떻게 우리가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혜이다.
다윗은 그 이후 성숙하여 사울도 두 번이나 살려주었고,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는 그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지 않도록 말렸다.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하신다고 받았기 때문이다.
(삼하 16:10-12)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서 여러분이 궁지에 몰려있는데 그것을 오히려 기회삼아 비난하고
저주하는 시므이들이 있다면 다윗처럼 생각하고 다윗처럼 시므이를 처리하시기 바란다.
결국 시므이는 솔로몬 대에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죽고 말았다.
다윗의 옆에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 총사령관 요압이었다.
요압은 충성도 했지만, 내부의 적노릇도 했다. 세력을 키워서 다윗왕 다음가는 행세를 했다.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했다. 생전에 그를 처리할 수가 없었고, 마음이 많이 상했다.
상하게 하는 갈대 때문에 상한 갈대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왕상 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결국 요압은 자기 힘만 믿고 다른 왕을 추대할려다 솔로몬의 손에 죽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못기다려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요압들을 당장 처리할려고
하지만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상한 마음을 잘 달래며 인내하는 것이 성숙이다.
모세도 나이 40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왕궁을 버리기로 결단하였는데 40년 동안이나 광야에 버려두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심지에 연기만 모락모락하였겠는가?
상한 갈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 ‘떨기나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꽃’이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로 지낼 때도, 떨기나무 신세가 되어 지낼 때도
하나님은 불꽃으로 항상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그렇게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떨기나무로 살 때 내 불은 타오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연기만 내는 삼나무)에 은혜와 축복이 있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죄에 대해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회심 후에도 그리스도인은 상한 마음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함을 통해 내가 참나무가 아니고 갈대인 것을 알게 된다.
상함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 속에 교만의 찌끼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은혜와 자비에 의해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보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 때
위로받고 덜 낙심할 수 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베드로가 통곡할 때 상한 갈대였다.
이 갈대는 그렇게 상함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였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신앙 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보다는 그들의 실패와 상함이 교회에 더 큰 위로를 준다.
다윗도 죄를 토설하기까지 신음하고 뼈가 쇠하였다고 말한다.
(시 32:3-6)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히스기야도 그의 뼈를 꺾으셨다고 호소하였다.
(사 38:13-17)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택하신 그릇인 사도 바울도 너무 자고해지지 않도록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러나 악한 생활을 하며,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와 격려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선고된 심판이 아직 집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직은 그들이 생각과 결심을 새롭게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게 주시는 위로와 기다림은
어디까지나 회심과 구원을 위한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것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엄하신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기 위해서 택한 종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 마음에 기뻐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이방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길에서 넘어지고 상하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길에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처음 믿을 때, 죄에 대한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 율법의 채찍을 충분히 맞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타락하고 배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회심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높아진 생각을 낮추는 성령의 작업이 필요하다.
(고후 10:4-5)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성령은 사람들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어떤 고통을 더하게 하시기도 한다.
고통은 사람을 성결하게 하며, 치유하고 정화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함 위에 상함을 겪게 하실 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가혹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교도 리차드 십스는 말한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함을 받으신’(사53:5)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상함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시는지
무지한 사람들은 심령이 상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롭고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너무나 강퍅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에, 한 사람을 그의 본성으로부터 은혜로 데려가는 것과,
은혜로부터 영광으로 데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순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상처를 입히시고, 그 다음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이다.
상처 하나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험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시험받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라.
내가 당하는 시험에 따라서 은혜와 위로가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비하셔서, 상한 갈대와 같은 나를 꺾지 않으신다면,
나 자신도 나를 절망으로 꺾지 않아야 한다.
또 나를 찢기 위하여 우는 사자같이 덤벼드는 사탄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아야 한다.
주님이 꺾지 아니하시는 상한 갈대를 내가 꺽지도 않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상한 갈대를 꺾는 감독관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 주님은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셨다.
들레는 것은 야단스럽게 떠드는 것을 말한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셨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도 내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보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을 주님 말씀하셨다.
(마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님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시면서,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게 하시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껴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가롯 유다, 나발, 시므이, 요압들을
주님의 방법과 지혜로 생각하고 처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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