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구원이 뭐꼬?”

새벽지기1 2016. 11. 18. 07:20


이 대목에서 내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약간 늘어놓는 걸 용서하시라. 목사 경력 26년째로 접어든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주 또렷해야 하겠거늘, 평자는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게 더욱 아득해진다. 예수에 대한 인식과 사랑과 신뢰는 돈독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그의 운명이 이전에 비해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이치가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구원 자체에 대한 확신은 별로 탄탄해지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믿음이 부족한 탓인가? 믿음만 강하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넘쳐나게 될까? 이제라도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부르짖어야만 할까?


나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나는 구원 문제에서 믿음이 유일한 근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짝사랑이나 황우석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어떤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여지없이 열광적인 믿음의 사태 속으로 빠져든다. 이라크 침략을 결행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역시 돈독한 믿음을 의지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 자신의 믿음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성서는 이 믿음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거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마지막 때에는 믿는 자를 보기 힘들다는 말씀도 있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도 “네 믿음이 구원했다.”는 말씀도 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믿음을 통한 의와 구원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도 역시 이런 구도와 동일하다.


여기서 설교자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모든 말씀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라는 대상에 의해서만 그 근거가 확보된다.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말하는 믿음도 율법과의 대립적인, 또는 변증법적인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지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알을 향한 열정도 믿음이라면 믿음이다. 구약성서는 그런 믿음을 악하다고 단죄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전혀 믿을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는 어느 한군데에도 인간의 믿음 자체를 독립적으로 높이 평가한 적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을 상대화할 정도였다. 오해는 마시라.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믿음은 그것 자체 내부에 존재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목회와 설교행위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믿음’만 강조했던 분들은 평자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도대체 믿음 말고 무엇을 선포해야한다는 말인가? 평자의 생각에 따르면 설교행위는 청중들을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안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 열려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조금이라도 엿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을 몇 가지 규범으로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확실성의 토대가 될 수 없는 인간의 심리적 확신에 매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야겠다. 왜냐하면 이 개방성 개념은 기독교 신앙 전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수많은 구원 사건들은 이 세상살이가 다양한 것만큼 다양하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처럼 정치적인 사건으로부터 질병 치유나 위기 극복처럼 개인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구원의 유형이 성서에 등장한다. 예수의 공생애에서도 구원은 매우 다층적으로 벌어진다. 죄의 용서, 병의 치유, 팔복, 말씀 들음, 그리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부활 등이다.


구원에 대한 성서의 표상이 다양하다는 말은 구원이 폐쇄된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사건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열려진 구원의 완성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곧 구체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열린 마음으로 통찰하고 기다려야 한다. 현재 우리가 예상하거나 확신하고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최종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난다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 기독교 신앙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마 25:3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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